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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도암 4기 8년의 기록 - 두번의 자살 실패 후 야채스프를 만나다
고정혁 기자 입력 2011년 10월 31일 16:56분894,406 읽음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지내다가 때가 되면 떠나리라 하는 나의 생각은 너무도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퇴원하자마자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니, 전쟁이 아니었다. 전쟁이라면 나도 상대편을 가격해야 했다. 상대가 10번을 치면 나도 한번쯤은 상대를 치는 시늉이라도 해야 싸움이라고 억지라도 쓸법한데 실상 나는 일방적으로, 무자비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암이 가격하는 '통증'으로부터.

항암치료를 시작하면서부터 생긴 통증은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은 모르핀 주사를 맞아서 모르고 지냈었는데 퇴원하면서 타 갖고 온 먹는 진통제로는 도무지 목과 가슴의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낮이면 그런대로 어떻게 견디겠는데 밤이 시작되면 통증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나를 괴롭혀댔다. 주먹으로 가슴을 때리고, 가슴을 벽에 사정없이 부딪혀봐도 견딜 수가 없어서 거실로 방으로 기어 다니고 뒹굴며 온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기가 매일이었다.

얼마가지 않아 해가 지고 밤이 되면 두려움이 찾아왔다. 입안은 완전히 헐어서 침도 제대로 삼킬 수가 없었다. 말만 해도 혀가 찢기고 음식물을 한 모금 넘기려면 목에다가 힘을 꾹 주어야 내려가는데 내려갈 때의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잇몸은 치솟아 이에 해놓았던 보철이 떠 있어서 입을 움직이면 혀나 입안에 찢겨서 보철을 해 넣은 이를 다 뽑아버렸다. 견디기 힘든 고통은 강도를 더해가고 미안함에 아내와 아이들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가족들은 밤마다 나를 위해 철야 예배를 다니고 있었다.

결국에는 내가 죽어야 이 모든 것이 끝나리라는 생각에 아내에게 한 통, 아이들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서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가족들이 예배를 보러 나간 밤에 결심을 하고 한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깜깜한 밤에 한강에서 물결치는 소리를 들으니 죽음이 너무 두려워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다음날도 역시 통증이 찾아왔고 한강으로 다시 나갔다. 마지막 길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한강에 몸을 던지고 그 다음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의식을 잃었다가 누군가가 내 뺨을 때리면서 가슴을 눌러댔다. 그리고 집이 어디냐고 묻는 목소리가 멀리 들려왔고 어디쯤이라고 대답을 하고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어느 사우나 실이었다. 알고 보니 당시 한강에서 낚시를 하던 사람들이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구해서 인공호흡을 해주고는 생명은 지장이 없는데 집을 말하지 않으니 사우나 실에 나를 데려다 주고 간 것이었다.

차마 집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아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걸음조차 걸을 수 없이 자꾸만 쓰러지고는 했다. 그 다음날, 그만 나가라는 재촉에 조금만 있다 나가겠노라고 대답하고는 얼핏 잠들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깨워서 보니 둘째딸 남자친구였다. 그렇게 첫 번째 자살시도는 미수로 그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가족의 입장에서는 마음고생이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나를 보면 하나님이 살려주실 거야 하면서 안심을 시켜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이 고통과 맞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결국, 그 다음날 차라리 산속에 가서 생활하다가 굶어 죽겠다고 결심하고는 통증이 시작되는 밤에 무작정 택시를 타고는 기사님께 서울을 벗어나 지방의 아무 사우나에나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술 두 병을 사들고 들어가 술을 마시며 뜬눈으로 밤을 밝히고는 새벽에 밖으로 나와 눈에 보이는 아무 산으로나 향했다.
산 입구에 도착하니 철조망이 둘러쳐 있고 '이곳은 지뢰가 묻혀 있으니 접근 금지'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차라리 이곳에서 지뢰를 밟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철조망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돌아다니다 보니 반공호가 있어서 여기에 자리를 잡고 사가지고 간 술을 마셨다. 계속 술만 마시면서 하루인지, 이틀인지 날이 밝고 어두워지고 다시 밝기를 되풀이하다가 의식이 끊겼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거슴츠레 눈을 떠보니 병원 응급실이었다. 나중에 시간을 따져보니 산에 올라간 지 3일만이었다. 산에서 이름 모를 어느 분이 나를 구조해서 병원까지 데려다주셨다고 한다. 다시 만난 아내가 오열하는 모습을 보자 아내에게 써놓고 나온 편지 구절이 생각났다. 빚만 많이 남기고 내가 먼저 간다. 선하 엄마 미안해. 그리고 내가 죽으면 보험금이 조금 나올 텐데 이 돈으로 얼마의 빚이라도 갚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생은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

집으로 돌아온 후 우리 부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밤새도록 울었다. 아내는 용기를 주면서 마음 약하지 먹지 말라며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반드시 당신을 고치고야 말겠다며 울부짖었다. 그 뒤로 아내는 오직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하였다. 낮에는 미용실에서 일을 하고 밤만 되면 철야예배를 다녔다. 돈 없고 가난한 아내가 기대고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었을 것이다. 두 차례의 자살소동은 주민의 신고와 보살핌으로 가족 품으로 돌아오면서 끝나게 되었다.

죽으라는 목숨이 아닌가보다 싶었다. 아니, 사람인지라 죽음이 두려웠고 죽음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또 살수만 있다면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낮에는 통증을 참으며 암환자모임, 암시민연대, 암을 이긴 사람들 등의 모임, 대체의학을 하는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게 되었고 암을 이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또 들었다.

그런데 다니면 다닐수록 암이라는 병은 한 가지인데 약은 수십 가지가 되고 권하는 모든 식품들은 빚에 쪼들리는 나에게는 너무도 고가였다.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아, 여기도 길이 없구나. 치료하기를 포기하고는 오산리 기도원을 가게 되었다. 기도원 생활 중 김기승 목사님과 상담을 하는데 목사님께서는 항암과 방사선 치료 안 하기를 잘했다며 용기를 주시면서 현미밥과 야채와 과일을 기본으로 하는 식이요법과 건강식품 이름 몇 가지를 적어주시면서 명함을 건네주셨다.

처음으로 듣는 치료와 식이요법에 나는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남대문 수입상가에서 몇 가지 건강식품을 사서 먹으면서 상황버섯이 좋다고 하여 경동시장에서 북한산 상황버섯을 1킬로에 21만 원을, 산초기름이 좋다고 하여 산초기름 1병에 10만 원을 주고 구입하여 먹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새벽예배에 가족과 함께 참석하여 기도를 하던 중 안수집사님으로부터 신사동에 있는 사랑의 의원을 소개받았다. 당신 처남이 대구에 사는데 대장에 걸려 수술하고 항암은 하지 않고 사랑의 의원에서 면역주사를 맞고 있는데 아무런 고통이 없다면서 권유해주셨다.

당장 찾아가 상담을 받았는데 독일에서 수입한 미슬토와 아브노바였다. 주사 놓는 것을 배워서 약을 구입해 집에서 직접 환자들이 주사를 놓으면 된다며 면역력을 높이는 약이라고 하셨다. 고통도 없이 좋다고 하였는데 내게는 너무도 감당하기 힘든 가격이어서 돈이 없다고 말하고는 병원을 나서는데 그곳에 근무하는 선생님 한 분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렇게도 가정형편이 어렵습니니까 묻고는 그렇다면 이것을 해보라며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어주셨다.

집으로 돌아와 읽어보니 무, 당근, 우엉, 표고버섯, 무청, 이 다섯 가지를 달여 먹으면 좋다고 쓰여 있다. 그때 생각으로는 이런 흔한 야채보다 더 좋고 귀한 상황버섯과 건강식품을 먹고 있는데 무청 같은 걸로 어떻게 약이 되겠나 싶어 종이를 버렸었다. 그리고는 잊고 지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바로 그분이었다. 야채스프를 먹고 있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직 하지 않고 있다고 사실대로 대답하니 얼른 병원으로 자기를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너무 흔해서 약이 될까 싶지만 그 내용대로 꾸준히 복용하면 좋은 결과를 볼 수 있다고 하시면서 왜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느냐며 병원에 오면 나은 사례와 자료를 주겠다는 것이다.

찾아가니 선생님께서는 <야채스프건강법>이라는 책 한 권과 미국 한인교회 회장과 장로님이 체험한 내용을 담은 16페이지짜리를 건네주시면서 꾸준히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셨다. 그러니 절대 소홀히 하지 말고 원칙과 규칙을 지키면서 적당량을 정성을 들여 만들어 복용하라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고 다시 밑줄을 그으면서 읽고, 여러번 읽다보니 전문가가 연구하고 많은 사례가 실려있어 믿음이 가기 시작했다. 그중 기억에 남는 사례로는 고향이 대구이며 미국에 살고 미국 한인교회 장로이며 한인교회 장로회장으로 1997년에 대장암 수술을 하고 항암을 포기하고는 야채스프요법만 하는데 지금까지 아무 이상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분 부인도 당뇨병으로 고생하는데 야채스프와 현미스프로 당뇨병을 고치고 건강하게 살면서 교회에서나 어느 모임에서나 간증을 하며 아픈 환자들에게 야채스프요법을 권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내 처지에서는 돈이 많이 들지 않고 재료 구입이 쉽다는 것이 야채스프요법을 해보기로 결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하기야 무슨 다른 수가 있을까. 병원에서 타가지고 온 약이 당시 12가지나 되었는데 거기서 겔포스만 두고는 모두 버렸고, 상황버섯과 산초기름도 모두 버렸다. 결심하기로 한 이상 다른 쪽에는 미련을 둘 필요가 없었다. 야채스프를 처음 만들던 날. 2004년 5월 중순이었다. 책에 나온 대로 재료를 구입하고 만들어서 야채스프를 복용하고 15분 내지 20분 후에 현미스프를 복용하였고 여기에 더하여 요로법(소변요법)도 병행하였다.

새벽 처음 나온 소변을 버리고 중간부터 30cc 정도 받아 야채스프를 타서 마셨고 커피관장과 식이요법도 하게 되었다. 더불어 매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프기 전에는 등산을 해본 일이 없어 등산화가 없어 운동화를 신고 다니다가 미끄러운 길에 사고가 나기도 했다. 아빠가 다치는 모습을 보고는 작은딸이 등산화를 사갖고 들어왔고 행복해하며 그 등산화를 신고 매일 산을 다녔다. 운동화와는 달리 미끄럽지도 않아 좋았고 딸이 사준 것이라 너무나 좋았다. 처음에는 불광천을 다니며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산에 다니기로 하고 서대문구청 뒷산인 안산을 다니게 되었다. 확실히 평지인 불광천을 다니는 것과 산을 오르는 것과는 차이가 많이 났다. 불광천을 걸을 때는 두통이 있었는데 산을 오르면 그런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산을 다니기로 하였다.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그렇게 현미와 야채 식이요법, 야채스프와 현미스프, 요로법, 커피관장 등을 하며 산을 다녔다. 아무런 치료도 약도 없다는 절망감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치료를 하고 재료를 사고 만들고 먹고 운동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 이 개월쯤 지났을 무렵, 작은딸 선미가 강원도 오색약수터에 있는 호텔에서 이상구 박사님이 세미나를 하니까 여기에 참석하라고 하였다. 아빠는 돈도 없는데 어떻게 가냐고, 안 간다고 하니 딸이 웃으며 이미 참가비는 냈으니까 걱정 말고 다녀오라는 것이다.

당시 내 몰골은 머리카락은 다 빠져 있었고, 손톱과 발톱도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다 빠져 있었다. 걸음걸이도 불편했고 먹는 것도 죽조차 편하게 삼키지 못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우리 처지에 적지 않은 돈을 다 냈다고 하니 안 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많은 암환자들이 전국에서 왔다.
나는 2인실을 배정받았다. 한 방을 쓰는 분은 여의도에서 오셨는데 이분은 갑상선암으로 수술을 하고 항암을 받던 중에 전이가 되어 있었고, 항암이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여기를 두 번째 왔노라고 하셨다. 그분도 치료를 중단한 상태이고, 나도 치료를 중단한 상태로 암은 다르지만 4기 암환자에다가 항암치료 후의 서로의 모습을 마주보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과연……. 근심걱정이 앞섰다. 첫날 밤, 우리 둘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며 말없이 긴 밤을 보내야했다.

월간암(癌) 201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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