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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사유(思惟)를 만나다
구효정(cancerline@daum.net) 기자 입력 2023년 01월 16일 21:59분5,638 읽음


글: 김철우(수필가)
가벼운 옷을 골랐다. 늘 들고 다니던 가방을 놓고, 가장 편한 신발을 신었다. 지난밤의 떨림과는 무색하게 준비는 간단했다. 현관문을 나서려니 다시 가벼운 긴장감이 몰려왔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전시였던가. 연극 무대의 첫 막이 열리기 전. 그 특유의 무대 냄새를 맡았을 때의 긴장감 같은 것이었다. 두 금동 미륵 반가사유상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렇게 시작됐다.

두 반가사유상을 알게 된 것은 몇 해 전이었다. 잡지의 발행인으로 독자에게 선보일 좋은 콘텐츠를 고민하던 중 우리 문화재를 하나씩 소개하고자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둘러보다가 같은 자세의 반가사유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신구와 옷 주름 등의 화려함과 간결함의 차이 정도만 있을 뿐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은 반가 자세와 오른쪽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빠진,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두 반가사유상만 따로 전시한다는 소식을 듣고 쾌재를 불렀다. 제작 시대와 장소의 차이를 극복하고 나란히 앉은 두 작품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되기까지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2층 사유의 방에 들어서자 어두운 복도에 ‘순환’이라는 제목의 디지털비디오 작품이 먼저 시선을 잡는다. 그리고 복도 끝에서 돌아서며 마주하게 되는 두 반가사유상. 루브르의 모나리자처럼 유리관에 넣어두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손에 닿을 듯 어떠한 막힘도 없이 1,400년이란 시간의 파고를 넘어 이제 같은 공간에서 나와 마주 보고 있다. 더구나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사유의 뒷모습까지 오롯이 볼 수 있으니, 두 국보를 전시하는 박물관의 자신감과 자부심이 전시실에 가득하다.

반가사유상을 비추는 위쪽 조명은 숫자 8을 옆으로 눕힌 무한대 기호. 입구 복도의 순환이란 제목의 비디오 작품이 겹친다. 반가사유상에 집중하다 보니 몰랐는데 가만히 숨을 골라보니 코를 간질이는 냄새가 있다. 전시실 벽을 감싼 황토 내음이다. 전시실 벽 역시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도록 설계해 확장성을 주고 있다. 특히 황토는 항생, 항균 효소가 함유되어 있어 곰팡이와 세균을 억제하며, 습도조절 능력이 탁월해 작품과 관람객 모두를 위한 선택임을 알 수 있다. 전시실 입구에서 두 반가사유상을 향하는 길도 약간의 오름길이며, 반짝이는 별빛으로 천장을 마무리하여 마치 밤하늘 아래에서 두 작품을 대하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반딧불이 빛나는 동굴에서 반가사유상을 마주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모두가 두 반가사유상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 설계한 최욱 건축가의 세심한 배려가 양모처럼 포근하다.

언젠가 모 TV 프로그램에서 반가사유상의 주조과정을 재현한 적이 있다. 우선 철심으로 불상의 머리에서부터 대좌까지 뼈대를 세운 다음 점토를 덮어 대충의 형상을 만든다. 그 위에 밀랍을 입혀 반가사유상 형태를 섬세하게 조각한 후 다시 흙을 씌워 거푸집을 만든다. 그리고 거푸집에 열을 가하면 내부의 밀랍이 녹아내려 반가사유상 모양의 틀이 생긴다. 거기에 구리와 주석을 섞어 만든 청동을 붓는다. 청동이 굳으면 거푸집을 떼어내고 반가사유상을 만난다. 그러나 쇳물 온도와 속도에 맞춰 거푸집 안에 청동을 붓는 과정이 가장 어려운 단계다. 부은 청동이 거푸집 안쪽으로 고루 퍼져야 함은 물론이려니와 일정한 두께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견뎌야 했을 것이다. 수백 번의 같은 과정을 반복하며 실수를 줄여나가지 않았을까. 그리고 마침내 지금 앞에 놓인 금동 반가사유상을 만들어 낸 그 시대의 장인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리고 불가의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불을 당시 사회가 얼마나 희구했기에 시대의 저편에서 다시 같은 모습을 한 반가사유상을 탄생시켰을까. 영화에서의 ‘오마주’ 같이 존경의 의미를 담은 작업이었을까 아니면 당시 주조 기술의 발전을 시험하는 기준이 반가사유상이었던 것일까. 후대(7세기 초)에 제작된 반가사유상이 간결하지만 조금 더 완성된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가까이에서 찬찬히 들여다본다. 두 반가사유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느낌은 관람객 수만큼이나 다양하겠지만, 날렵한 콧날 밑으로 작은 입술에서 알 듯 모를 듯 번지는 옅은 미소에서 시선을 거두기 어렵다. 그동안 내가 처했던 모든 상황에서도 이처럼 고요하게 나 자신을 마주 볼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사유(思惟)하는 존재로서의 위대함’은 수천 년 전 싯다르타가 열반에 든 순간에서부터 삼국시대 반가사유상을 제작했던 장인의 손을 거쳐 이 순간까지 시간의 허물을 벗고 세월을 관통한다. 인류가 존재하는 동안 그 위대함의 빛은 바래지 않을 것이다. ‘지혜는 가르칠 수 없다.’라고 한 헤르만 헤세의 말을 떠올린다. 그러니 언어를 떠나 사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동의 시선을 보내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아닐까.

굳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에서 보지 않아도 좋다. 조금 떨어지면 두 반가사유상의 시선과 동시에 마주한다. 작품 앞에 서서 미소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또 다른 위안을 얻는다. 후회하는 삶을 산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감상하는 관람객과 한 프레임에 넣고 보아도 또 다른 작품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작품을 넘어 인류의 유산이 된다.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필요할 때 나는 또 이촌역을 향하는 지하철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10여 년쯤 지나 손자의 손을 잡고 다시 두 반가사유상 앞에 설 수 있다면, 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며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

월간암(癌) 202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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