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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새와 쭈쭈병

이 기사는 고정혁 기자가2011년09월19일 11시34분에 최종 입력하였습니다. 총 878575명이 방문하여 읽었습니다.

서지숙 | 유방암 10년

내겐 딸이 있다. 암 투병 10년 동안 엄마를 지켜보며 자라서일까. 내가 힘들 때면 한쪽 어깨에 기대도 되는 어른으로 빨리 자랐다. 딸아이가 쓴 <빨간 새와 쭈쭈병>을 교회 회보에서 읽고 강산도 변한다는 그 시간들이 모두 고통만은 아님을, 새삼 감사한다.

빨간 새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직후, 중간고사 기간이었을 거다. 처음 그것이 손끝에 닿던, 커다란 위기감이 만져지던 그날이 말이다. 여승은 죽을 때도 외로운 건지 아니면 성직자란 게 원래 외로운 건지 할머니가 두 번째 중풍을 맞고 평생 자주 보지도 않은 아들 집에 얹혀 꼼짝없이 식물인간 상태였던 그때였는데, 엄마의 가슴에 뭔가 불쾌한 것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그 후 상황이, 뭐가 뭔지 잘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나는 얼이 빠져서 그냥 돌아다녔고, 아빠는 마음에 준비를 하랬었고, 두 분은 병원에서, 나는 혼자.

할머니는 식사와 가래제거를 위해 목에 관을 뚫어 수시로 가래를 제거해야 했었는데 가래를 제때 제거해 드려야지 안 그러면 바로 비상사태에 돌입하기에, 아빠의 중차대한 임무를 물려받아 작은 아빠가 우리 집에서 출퇴근하시고, 작은 엄마가 가끔 들려 반찬을 해주시고 나는 수학학원에서 밤샘공부를 하고 집에 늦게 돌아가는 그런 날들의 반복이었다. 문득 생각나는 것은, 그때 나는 술을 못 마시는데 꿀꿀한 기분이 들어서 전에 딸기맛 웰치스를 마시면 좀 취한다고 친구들 중 누가 그랬다는 생각에 잔뜩 마셨던 기억. 뭐 하나도 안 취하네 하고 언제나처럼 작은 아빠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나는 그가 입을 여는 순간마다 긴장했다. 무슨 말이 나올까 겁이 났다-내 방으로 쑥 들어갔던 기억. 그러고는 잠도 못 자고 새벽 늦게까지 계속 카레카노를 봤던 기억.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지만, 퇴원하고 집에 돌아온 엄마는 엄청나게 피곤해져서는 약물치료나 화학치료를 병행하기 거부했다. 아팠으니 망정이지 아빠랑 밤낮 싸웠어야 맞는데 그냥 아빠가 포기. 나는 뭐가 뭔지 몰랐으므로 만류 못함.

웬일인지 할머니까지도 오늘내일 하셔서- 아빠는 할머니가 의식은 있으셔서 집에 뭔가 일이 있다는 생각에 미안함으로 자꾸 일찍 가시려고 했던 거라 하셨다- 친척들이 다 집에 와있게 됐다. 철모르는 사촌 동생들이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화학치료 후유증 때문에 벌게진 수술자국을 드러내놓고 맘껏 소리 높여 울지도 않고 끙끙대는 엄마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참을 수가 없어져서 꺼져버리라고, 저리 가라고, 소리를 꽥 질러대야 했다.

수술을 받아서 엄마가 다시 산다면야 건강해진다면야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겠지만 또 그때처럼 괴로워하는 엄마모습을 볼 것을 생각하면 정말 규칙이고 뭐고 그만 살고 싶어질 만큼 그렇다. 엄마는 엄마답게 덤으로 산 인생이라고 뭐가 아쉽냐고 하고, 나는 나답게 그 말에 반발심이 확 생겨서는 심술을 부리게 된다.

할머니는 결국 얼마 안 되어 돌아가시고, 내가 살던 석촌호수 옆의 5층짜리 아담한 주공아파트가 재개발에 들어가기 전, 아파트건물 중앙, 공터를 빙 둘러 심어있던 벚꽃엔 녹음이 풍성했다. 진물이 흐르고 얼기설기 꿰매놓은 것 같아서 보기 괴롭던 엄마의 가슴은 조금씩 아물어서 빨간 수술 흉터만 선명했는데 그 모양이 왼 위쪽을 향해 머리를 틀고 비상하는 새 같아서 나뭇잎새가 살랑거리는 창을 열어 둔 채로 나란히 누워 종종 어루만지곤 했다. 그러고 있자면, 엄마로부터 엄마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조금씩 떠나라고 하는 그런 표식 같기도 해서 참 맘이 싸해져 왔다.
지금 그 창이, 그 산들바람이, 그 집이 다 무너지고, 그 아름답고 웅장했던 고목들도 뿌리 뽑혀 다 어딘가로 옮겨가거나 태워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새삼 다시 하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어제는 술 냄새도 많이 나고 그랬을 텐데, 엄마가 아무것도 타박을 않는다. 또 맘이 괜히 안 좋았다. 씻고 나갔더니 약간 붉어진 눈으로 엄마가 '그래도 많이 컸다고, 학교 안 다닌다고 엄마 아픈데 어딜 가냐고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이제 많이 컸다'고 그런다. 계면쩍은 표정으로 돌아서서 이불 뒤집어쓰고 한참을 울었다. 나는 아직 엄마가 없으면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쭈쭈병
암은 내 생애 가장 큰 축복이에요. 라는 (말도 안 되는!)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가끔 엄마랑 아빠의 최근의 양태를 지켜보면 그 말이 일리가 있구나 싶다. 두 분의 닭살 행각은 도를 지나쳤고, 덕분에 수시로 구토증을 유발하는 말과 행위들을 피해 귀를 막고 눈을 감아야 하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늘 엄마는 어느새 한예슬보다 예쁜 여인이 되어 있고, 그녀의 발아래는 순종하고 복종하는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기사가 넙죽 엎드러져 있다.

엄마가 아플 때마다 아빠는 엄마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금방 따라가고 말 거라고 하는데, 매번 그때마다 피식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들을 수밖에 없는 게, 진정 진정성이 있는 말이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사실 지금도 어렵기가 한이 없고, 지나온 길이 험난했기에, 항상 가시덤불로 피투성이가 된 이미지로 가족이란 단어가 내게 다가온다 해도 두 분의 관계에 대한 확신만큼은 이제 굳건하다. 이토록, 이렇게,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곁에서 보듬어줄 동반자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리라. 함께한 모든 시간들로 다져진 끈끈함이, 그 다정함이 가끔 눈에서 불을 뿜을 만큼 부럽다.

암이라는 커다란 담벼락을 또 한 번 부수고, 넘었다. 이제는 여유도 생겨서 웃을 일도 많다. 1kg이 줄었다는 자랑스러운 엄마의 말에, 가슴 한쪽이 없어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느냐고 어느 분이 말하자 옆에 다른 분이 중얼거리신다. '하긴 작지도 않았잖아?' 같이 자리했던 모두들 배를 잡고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더 히트는, 아이스크림 광고에 나와도 될 만큼 깜찍한 내 외사촌 여자아이가 -올해 6살이다- 이모랑 문병을 왔다고 한다. 나는 그 자리에 없었는데, 나중에 전해 들은 말이 기가 막히다.
엄마 "하은아, 큰이모 어디 아픈지 알아?"
하은 "알. 아. 요."
이모 "큰이모가 어디가 아픈 줄 알아?"
망설이는 하은, 부끄러워서 쭈뼛거리다가 제 엄마에게 귓속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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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쭈병!"

암은 때론, 커다란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