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병수기
전립선암 말기를 딛고 칠순잔치를 하다
고정혁 기자 입력 2011년 06월 29일 15:20분888,824 읽음

김동삼(71) | 전립선암 4기. 전남 고흥군 포두면

전립선암 4기였지만, 사실 병원에서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별다른 증상이 없었다. 아픈 곳도 없었고 식사도 잘 하고 잠도 잘 잤다. 유일하게 문제라고 한다면 소변을 보면 소변 줄기가 발등에 떨어질 정도로 약했다는 것 정도였다. 남자가 나이가 들면 전립선 쪽으로 기능이 떨어지고 문제도 잘 생긴다는 얘기를 들어서 겸사겸사 검사나 한번 해보자 싶어서 병원을 찾았다. 그때가 2010년 7월초, 순천에 있는 성가롤로병원 비뇨기과에 가서 소변검사, 피검사, 초음파검사를 받았다. 별다른 걱정 없이 결과를 기다리는데 그곳 비뇨기과 과장이 깜짝 놀라면서 빨리 큰 병원을 가보라 권하면서 몇 가지 설명을 해주는데 전립선 수치, 즉 PSA 수치라는 것이 있는데 이 수치가 정상적인 사람은 0~5 정도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검사 결과는 무려 668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가 결과로 나왔다며 정밀검사를 속히 받으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암 진단을 받기까지는 검사와 길고도 긴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먼저 살고 있는 주변에서 가장 큰 병원인 전남 화순에 있는 전남대 병원 암센터를 방문했다. 성가롤로 병원에서 준비한 소견서를 갖고 전남대 병원의 담당의를 만나려는데 5일 후에 오라는 이야기를 한다. 내 생애 가장 길었던 5일, 5처럼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마침내 검사하는 날. 나를 포함해서 3명이 같은 검사를 받으려고 대기 중이었다. 아마 같은 병이리라 짐작을 하고 서로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다가 자기의 전립선 수치를 밝혔다. 한사람은 PSA 수치가 15라고 하고 여수에서 온 사람은 20이라고 이야기 했다. 나도 검사 나온 대로 "668이오"라고 대답하니 모두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당시만 해도 그 수치가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상상도 하지 못했고 그저 두 사람이 몹시 놀라는 걸 보고는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셋이서 함께 조직검사를 받았다. 나머지 두 명은 검사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가는데 담당의사가 나는 입원을 하고 하루 금식을 한 후에 방광을 검사해야 한다고 했다. 다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지금에야 알게 됐지만 PSA 수치는 정상의 범위가 0~4 이하로, 이 수치가 10 이상 되면 전립선암을 의심해서 초음파, 조직검사 등을 통해 전립선암 유무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립선암 확진을 받은 사람 중에는 이 수치가 20 내외인 경우도 있었고, 이 수치가 10 이상이면 전립선암일 확률이 50% 이상이라는데, 그렇다면 그 당시 668이라는 숫자는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심각해질 때까지 아무런 증상도, 통증도 없었던 걸 보면 암은 정말 무서운 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를 굶으며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그 하루 동안 살아온 나날들이 스쳐가며 많은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죽음의 공포가 나를 억누르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해서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오전 11시부터 다시 검사가 시작되었다. 평생 처음으로 뼈 사진도 찍고, MRI를 찍기 위해서 기계 속에 들어가 1시간 넘게 갇혀 있기도 했다. 한여름에 땀을 쭉 빼가면서 PET 검사도 받았다. 하루 종일을 검사를 받고 나니 이제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고 10일 후에나 다시 보자고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또 10일간의 시간이 흐르는데 참으로 길고 긴 시간이었다. 다시 의사를 만났다. 의사가 나에게 전해 주는 최종 결과는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나는 전립선암에 걸렸고 4기라는 것이다.

치료가 시작되었다. 먹는 항암약과 호르몬 억제 주사제로 시작된 치료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털이 빠지고, 기운은 없고, 먹는 것을 제대로 못 먹게 되어 '이제 나는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 달 동안의 항암 치료를 받는데 서울에서 일하는 아들과 두 딸이 병원을 찾아왔다. 사랑하는 자식들을 보니 나는 기운이 났지만, 애들의 낯빛은 노랗게 질려있었다. 이제 아버지가 어떻게 되는가 보다 싶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아들은 밤새 일을 하고 새벽 4시에 KTX열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아버지 걱정에 잠 한숨도 못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달려온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자식들이 옆에 버티고 있으면서 손을 잡아주니 치료가 아무리 힘들어도 애들 걱정시키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용기가 저절로 솟구쳤다.

사실 처음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아이들에게 병을 알릴 수가 없었다. 촌에서 암이 걸렸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 또한 이곳에서 한평생을 살았지만 암에 걸려서 살아난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병명을 듣고는 어디서 알아왔는지 야채스프와 차가버섯 등을 구해왔다. 평생 밥만 먹으면서 살아왔는데 아버지가 아프다고 걱정되어 아들이 정성스레 구해온 걸 생각하니 병원에서 주는 항암제보다도 더 큰 효과를 보겠구나 하는 기쁜 마음이 들었고 먹으면서도 암세포가 팍팍 줄어두는 기분이 들었다. 착한 아들의 효심이 들어 있어 기분이 정말로 좋았다. 병원의 약을 먹으면서 전남대 병원 의료진들이 주의할 음식에 대해서 나에게 몇 가지 당부를 했다. 소고기, 돼지고기는 살코기만 먹지 기름진 부분을 먹지 말라고 했다. 암환자 음식에 대한 몇 가지 상식이 생겼다. 차가버섯을 구입한 업체에서 알려준 대로 화학조미료와, 설탕, 소금 등 조미료를 일체 쓰지 않은 음식을 먹었으며, 소금 대신에 죽염과 같은 소금을 사용해서 음식을 했고 그릇을 모두 유리그릇으로 바꾸었다.

운동은 시작했다. 물론 시골생활을 하면서 몸을 안 움직일 수는 없지만 할 일 없을 때도 하루에 6Km이상은 햇빛을 받으며 걷기 시작했다. 또 마늘이 좋다는 말을 듣고 마늘을 전기밥솥에 2주 정도 묵혀서 흑마늘을 만들어 먹었다. 차츰 건강이 회복되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암과 투병하는 비용은 계속해서 들어가는데 시골에서는 도시와 달리 돈이 아주 귀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아이들에게 기댈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차가버섯을 제외한 나머지 식품들은 모두 끊게 되었다.

병원 치료가 끝나고 한 달에 한 번씩 정기 검사를 받는데 검사를 할 때마다 수치가 정상에 가깝도록 계속해서 떨어지는 것이다. 특히 PSA 수치는 668이었던 수치가 3개월이 지난 후에는 17로 떨어졌다. 물론 그 수치도 안심할 만한 수치는 아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3개월이 지나서 검사를 했다. PET 검사까지 같이 진행하였는데 그제야 모든 수치가 정상이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2월 8일 순천 전남대 병원에 갔다. 병원의 담당 의료진이 하는 말이 "이런 일이 없는데 선생님에게 일어났습니다. 이제 암이 몸에서 보이지를 않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날아갈 듯 기뻤지만 아들은 나보다 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아들은 말하기를 "올해가 아버지 칠순인데 칠순잔치를 못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하며 울먹거렸다. 참말로 내 아들이지만 너무나 대견하여 나 또한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내 칠순 잔치는 3월 12일이다. 아들이 소원하는 대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조촐하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다시 태어나는 것 같은 기쁨과 희망을 느낀다. 앞으로 얼마를 살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의 상태라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요즘은 전립선에 요가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흥군 노인복지관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많은 프로그램을 준비해줘서 기쁘기 짝이 없다. 덕분에 70이 넘어 요가를 배우고 있다. 요가 외에도 여러 프로그램에 참가하다 보니 많은 친구들도 만나게 되어 즐겁고 무엇인가를 새로 배우는 것이 재미있고 신이 난다. 끝으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알려준 고려인삼공사 임직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월간암(癌) 201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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