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병수기
폐암 말기에서 연장전 4년을 지나
고정혁 기자 입력 2011년 05월 12일 16:02분892,953 읽음

2007년 4월 1일. 내 암 투병이 시작된 날이었다. 느닷없이 오른쪽 갈비뼈가 아프기 시작했다. 통증이 얼마나 심했던지 날카로운 칼로 그 부분을 쑤셔대는 듯했다. 갈비뼈가 부러졌구나 싶어서 백병원으로 가서 갈비뼈가 부러진 듯하다고 의사에게 말하고는 검사와 진료를 받았다. 당연히 폐암 진단은 나오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전날 도봉산 산행을 다녀온 후 아프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기억은 없지만 산행 중에 넘어지거나 해서 가슴 쪽 어딘가 다쳤거니 생각을 해서 의사에게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너무 멀쩡한 몸으로 와서 얘기하니 암으로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냥 갈비뼈 검사만 했고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통증이 나아지질 않았다.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서 견딜 수 없어 다시 병원을 찾았다. 4월 20일이었다. 그 전에 동네 병원에서 폐가 나쁘다고 해서 그 말을 전했더니 이 번에는 의사가 여기저기 돌려보더니만 바로 폐암이라는 것이 아닌가. 병원을 찾은 그날로 CT부터 시작해서 조직검사까지 모든 검사를 몰아쳐서 하고는 폐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믿기지도 않을뿐더러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더니 어떻게 20일 만에 암환자가 될 수 있느냔 말이다. 그래서 진료기록과 검사기록을 모두 갖고는 국립암센터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기록만 보고는 해 줄 것이 없다며 이전 병원으로 다시 가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의사에게 사정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검사만 한 번 더 해달라, 만약 검사결과가 이전 병원과 똑같이 나오면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모든 검사를 처음부터 다 다시했다. 일주일 후에 결과는 이전과 다 똑같다고 나왔다.

망연자실해 있는 나를 두고 의사는 검사결과만 얘기하고는 나가버렸고 다른 의사가 현재의 내 상황을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차근차근히 짚어 주었다. 1기, 2기, 3기, 4기, 그리고 말기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4기와 말기는 완전히 다르다며 의미를 말해주었다. 듣다보니 4기라면 치료라도 가능하고 생명연장이 가능한데 말기는 어떤 치료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나 같은 환자는 생명보험을 타고 싶어서 의사한테 진단서를 받아서 보험회사에 제출하면 살아 있는 데도 보험금이 지급되는 상황이었다. 어떤 치료도 할 수 없고 생존기간을 물으니 한 달이라고 하며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너무도 충격적인 이야기에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다가는 그 자리에서 혼절해버렸다. 같이 듣던 아내와 아이들이 받는 충격이야 말해 무엇을 하겠는가.

지금 와서는 내 경우에는 의사의 현실적인 이야기가 앞으로의 치료와 투병의 의지를 다지는데 도움이 되었다. 생존기간이 한달을 받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단은 한 달을 늘려야 했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 치료는 의미가 없다 해도 6개월 정도로 생존 연장이 된다면 항암을 하겠다고 말했다. 2007년 5월 8일부터 10월 말까지, 약 6개월 동안 항암 12차를 받았다. 당시 양쪽 폐의 95%가 암으로 덮여 있었다. 폐는 5%밖에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내게는 암의 자각증상이 전혀 없었다. 가슴이 아팠던 것을 제외하고는 기침이나, 가래, 호흡이 쌕쌕거리는 등의 어떤 느낌도 없었다.

어쨌든 첫 항암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시한부 한달 선고에 벼랑 끝에 몰린 심정, 여기에 항암까지 받고 나니 차에서 내릴 기운조차 없었다. 부축을 받고 내려서 든 생각은 '나는 여기서 쓰러지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의 생명력을 시험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족들을 먼저 올려 보내고 아파트 10층인 집까지 계단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어차피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가까스로 집으로 들어가 바로 방으로 들어가 바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는 신변 정리를 시작했다. 재산을 정리하고, 통장을 정리하고, 죽고 난 후에 연락할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유서를 가족들 앞으로 한 통씩 쓰고는 등기부등본 안에 감춰두었다. 죽고 나서 개봉하라고 적어두었다.

그리고는 내 암에 대해 생각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왜 내가 암에 걸렸나'였다. 짧은 지식이나마 암의 원인인 유전이나 환경 등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럼 왜 걸렸나 나는 어떻게 살았기에 하고 생각하니 지난 50년 세월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참 잘했다 싶은게 없는거다. 결국 그 문제의 해답은 '내 잘못이다' 였다. 이래서 암에 걸렸구나. 걸릴 만도 했다. 참 싸다 싶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 답은 '내가 걸어온 길을 밟지 말고 이전처럼 살면 안된다'였다. 그리고는 투병계획을 정했다.

특히, 마음을 비우는 것이 중요했다. 직장에서의 승진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다른 사람을 이기려는 욕심이 많은데 마음을 내려놓지 않으면 아무리 음식을 바꾸고 생각을 바꿔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며칠을 집에서 보내니 아내는 완전히 변해버린 나를 보고는 진작 이렇게 했으면 암 안 걸렸을 거라고 놀라움 반, 아타까움 반의 말을 했다. 부끄럽지만 나는 대단한 독불장군이요, 독재자였다. 모든 것들은 내가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한 대로 이루어져야 했다. 여전히 미안하기만 한 아내는 결혼 생활 동안 단 한번도 냉장고를 자기 손으로 골라본 적이 없다. 이사를 다닐 때도 집을 선택하는 것은 내 권한이었다. 집안이나 직장, 사회생활, 모든 범위에서의 일들은 내 고집과 성질머리 때문이었지만 내가 판단하고 결정해야했다. 당시는 몰랐지만 암에 걸리고서야 이 일들이 얼마나 내게 스트레스인지를 알았다. 또, 암에서 이기려면 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운동은 독하고 무식하게 했다. 항암치료 중에도 항암을 맞고 다음날 부터 매일 도봉산을 정상까지 올랐다. 암 이전에는 한 시간 반이면 너끈했는데 무려 다섯 시간이 걸렸다. 아픈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암이라는 진단 바로 전날에도 도봉산을 멀쩡하게 올랐는데 불과 20일 지나 암 핑계를 대며 산을 오르려고 조차 하지 않는 나약한 내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당시 뼈에 전이가 되어 오른손을 전혀 쓰지 못해서 숟가락을 들지 못하는 데도 나는 암벽을 탔다. 오른손을 쓰지 못하고 왼손만 쓰니 위로 올라가지를 못하고 자꾸만 옆으로만 가니 속이 너무 상해서 내려다 보며 확 떨어져 버릴까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책을 보니 암환자가 하루에 운동을 5시간을 했다고 적힌 것을 보고는 나는 거기다 1시간을 더해서 6시간씩 했다.

한 순간에 50년 동안 달라지지 않았던 나의 모든 생각과 마음과 행동이 놀랍게 변화했다. 암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기적이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세상에 나 잘난 줄로만 알고 앞으로만 승승장구 하던 내 삶이 암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꺾이고 뒷모습을 돌아 볼 줄 알고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옆의 친구들의 손을 잡을 줄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 만나는 암 친구들은 이전의 나의 모습과 나의 성격과 행동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은 그 시절의 나에 대해 말을 해줘도 미지를 않는다.

항암을 쓰면 내성이 생기고 다시 바꾸기를 하다가 2008년 부터 타세바를 먹었다. 그러다 2009년도에는 이것조차 내성이 생겨버렸다. 더 이상은 쓸 수 있는 약이 없다는데 낙심해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의사는 한 달만 더 먹어보자고 해서는 약을 타 갖고 집으로 돌아 왔다. 약을 앞에 두고 기도를 열심히 했다. 한 달이 지나 검사를 하니 신기하게 내성이 생겨버린 것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한 달치를 더 연장하고, 또 연장해서 지금까지 타세바를 쓰고 있다. 생긴 내성이 사라지기도 하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 때 신기한 일로는 지인이 꿈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꿈속에서 하나님이 '연장전은 할 일이 남아 있으니 살려준다'고 하셨다면서 당신은 꼭 살 거라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내 기도를 해 본적이 없다. 암에 걸려서 당장은 내가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하고 아픈 줄로만 알았는데 투병하며 만나게 되는 암환자들이 너무도 안타깝고 가슴 아픈 사연이 많았다. 특히 젊거나 어린 암환자를 보면 눈물이 났다. 그래도 나는 나이도 먹었고 애들도 컸지만, 이제 젖먹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 어린 자녀를 둔 젊은 가장을 보노라면 절로 내 대신 저이들을 조금만 더 살려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된다.

나는 이름대로 연장전을 훌쩍 넘었다. 한 달이라던 목숨을 지금까지 살려주셨는데 나만 더 살려달라고 계속 기도하기가 너무 염치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앞으로 내 삶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할 일'을 위한 삶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목회로든, 다른 어떤 것으로든 기적의 연장전은 그것을 위한 일일 것이다. 몸과 마음의 변화로 삶을 사는 모든 암환자에게 내게 일어난 이 '기적'이 결코 지적만은 아님을 살아 있는 동안 증거하고 싶다.

월간암(癌) 201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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