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병수기
지금은 제게 행복한 시간입니다
고정혁 기자 입력 2011년 03월 31일 10:14분880,372 읽음

송은총(56세. 가명) | 유방암 3기(2007년 3월 진단)

저는 아들 둘에 남편, 그리고 시어머니와 함께 살며 가정을 돌보고 직장을 다녔어요. 평범한 가정주부고 직장인이었지요. 50대, 명퇴 전까지요. 명퇴라고들 하죠. 명예퇴직이요. 하루아침에 집에서 지내게 되자 기운이 없어졌어요. 힘이 하나도 없고 없던 병이 생기더군요. 우울하고 맥없이 지내던 어느 날, 갑자기 가슴이 몹시 아팠습니다. 전 심장의 통증에 놀라 심장병에 걸렸나 보다 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유방암이었는데 말이죠.

사실, 가슴에 멍울이 생긴 지는 오래됐습니다. 작게 잡히는 것 때문에 병원을 찾았는데 암도 아니고 그저 여자들 가슴에 흔히 생기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어요. 그 후로도 직장에서 건강검진을 받을 때마다 신경이 쓰였지만 별 이상이 없어서 괜찮겠거니 하고는 마음을 놓고 잊어버렸었지요. 그러니 가슴에 통증이 와도 유방암으로는 도무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지요.

그때가 2007년 2월이었어요. 너무 놀라서 남편에게 당장 병원에 가야겠다고 하니 남편은 3월이 본인 정기검진을 하니 좀 기다렸다가 같이 가자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도 통증은 가시지를 않아 하루는 화장실에서 옷을 들추고 자세히 보니 아, 벌써 유방에 주름이 나 있더군요. 전에 건강검진 항목에서 ‘유방에 변형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본 기억이 나면서 가슴이 쿵 내려앉았어요. 이건 벌써 변형이 생긴 거구나, 큰일 났다 싶어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다급히 큰 병원을 가니 예약이 차서 몇 개월 후에나 검사할 수 있다더군요.
급한 대로 동네 병원을 찾아 엑스레이를 찍고 초음파 검사를 받았어요. 누워서 의사의 모습을 지켜보니 가슴에 대고 또 대고 문지르고 하더군요. 긴장감이 밀려왔지요. 의사는 진료실로 불러 놓고는 큰 병원을 좀 가셔야겠어요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유방에 있는 건 7,80%는 암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고 얘기해줬어요. 그 순간부터 저는 무너져 내렸지요. 평생 씩씩하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도대체…, 내게….

남편은 전화로 암은 아닐 거라며 위로해주었지요. 몇 주 후로 예약하고 가족에게는 알리지 않고 남편과 저만 알고 마음 졸여가며 지냈었죠. 마침내 조직검사까지 하고 나니 유방암 중에서도 문제가 많은 종류의 유방암이라는 결과를 들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더욱 암이면 모두 죽는다고 생각했지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너무 속을 끓이고 살았나 싶은 회한도 들고,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 장가도 안 보냈는데, 나 없이 우리 집은 이제 어쩌나…. 살아온 날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고 모든 걱정이 밀물처럼 제 머리와 마음에 가득 차서 몇 날 며칠을 울기만 했어요. 그러니 눈물도 말라버리더군요. 문제는 그다음이었어요. 이제는 남편이 울기 시작했어요. 거꾸로 저는 남편을 위로해야 했지요. 나 안 죽을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수술하고 저는 암환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지요. 집도 남편도 아이들도 그대로였지만 제가 변해버렸습니다. 다정하고 헌신적이고 집안일에 충실한 엄마이자 아내, 며느리로 돌아갈 수 없었어요. 괜찮겠지 하고는 일상으로 돌아왔다가 이끌리듯 컴퓨터 앞에 앉아 유방암을 검색하곤 했지요. 암은 너무나도 무서운 병이었죠. 수술이 끝이 아니었고 전이되거나 재발하고, 뼈, 뇌, 간, 폐 등 다른 장기로 퍼진 같은 유방암 환자들의 얘기를 읽으면 너무도 두려웠어요. 압박감이 심해졌고 스스로 견뎌내질 못했었어요.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만 틀어놓고 온종일 보다가 방으로 가서 잠을 내내 잤어요. 참을 수 없는 무언가가 차올라서 물건을 막 집어던지기도 했지요. 가슴은 꽉 막혔는데 풀 곳이 없었고 또, 무섭고 무서웠어요. 평생 해본 적도 없는 욕도 해대곤 했으니까요. 그러다 정신과를 찾아갔답니다. 암이 전이, 재발하기도 전에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의사는 제 하소연을 듣더니 잠은 잘 자느냐고 묻더군요. 잠이야 내내 잤으니 잘 잔다고 하니 신경안정제를 처방해주었습니다. 그걸 먹으면 정말 내내 잠만 자게 되더군요. 일주일을 먹었나, 이러다 안 되겠다, 죽겠다 싶어서 전에 알게 된 같은 유방암 친구가 있는 요양원에 가겠다고 결심했지요.

동생뻘인 그 친구는 먼저 요양생활을 하면서 저보고 오라고 했지만 나 아니면 세금은 누가 내고 빨래, 청소, 밥은 누가 하나, 이 집이 어떻게 될까 싶은 불안감에 엄두가 나지 않았었어요. 하지만, 더는 견딜 수 없어 남편에게 요양병원을 가야겠다고 말했지요. 남편은 집 놔두고 왜 갑자기 거기를 가려고 하느냐고 묻더군요. 살려고 그런다고 대답했습니다. 진짜 죽을 것만 같아서 살고 싶어서 집을 나가 요양병원을 가려고 한다고 이틀 동안 남편을 설득해서 동의를 얻었어요.

아, 같은 암환자들끼리 서로 웃고 얘기하고 밥 먹고 산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불안감이 사라지는 걸 느꼈습니다. 같은 암환자에게서 느끼는 동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위안을 주었지요. 지금 절 보는 사람들은 모두 물어요. 아니 왜 암에 걸린 거냐고, 전혀 안 걸릴 사람 같은데 하고 말이에요. 아주 잘 웃고 활달하고 씩씩하니까요. 원래 내성적이던 제 성격은 암을 만나 완전히 외향적으로 변화되었어요. 마음이 활짝 열렸지요. 이제는 공중목욕탕도 거리낌 없이 훌훌 벗고 잘 다녀요.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곤 하면 ‘그래, 나 원숭이 한다, 실컷 봐라. 하나 잘랐다, 왜!’속으로 이렇게 말해줍니다.

수술하고 입원 중에 직장 동료가 찾아와 저를 붙잡고 해준 얘기가 지금까지 작은 등불로 제 마음 안에 남아있어요. ‘너는 꼭 건강해져서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 되어야 해. 꼭 희망이 되어라.’라고 말입니다. 저는 지금도 ‘나는 모든 사람의 희망이 될 거야’라고 중얼거리곤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 암에 걸려 괴로워하며 피폐해진 저를 항상 껴안아주던 우리 아들들. 늘 좋은 말로 위로해주던 남편. 네가 나아야 집안이 산다며 늘 나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걱정해주신 연로하신 어머님. 친정 식구들의 사랑과 도움은 큰 힘이자 버팀목이었지요. 따뜻함을 불어 넣어주고 흔들릴 때마다 붙잡아준 가족 덕분에 용기도 나고 힘을 낼 수 있었어요.

큰오빠가 수술하고 알려준 것이 있어요. 오빠는 의사이면서도 대체의학이나 여러 방면으로 이해가 깊었어요. 이렇게 해서 폐암이 나은 사람도 있다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5년이 되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하고 있답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누운 그대로 이렇게 마음으로 말합니다.

‘나는 은총입니다.
나는 여러분 안에 존재하는 신성한 은총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루겠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균형 잡겠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여러분 내면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나의 이름은 은총입니다.’

이 문구를 천천히 세 번에서 다섯 번 정도 기도처럼 외우고는 은총에 나의 몸과 마음을 맡기고 편안한 마음으로, 걸림 없이 하루를 시작합니다. 은총의 빛이 나를 보살펴준다고 상상해요. 투병 생활하다 보면 마음에 괴로운 일이 생기곤 하는데 그럴 때면 바로 ‘은총이 나를 보살펴주니까 모든 것이 다 술술 풀릴 거야. 은총이 해결해 줄 거야’생각하고는 바로 괴로움을 은총에 던져버립니다. 처음엔 안 되지만 계속하니 이제는 순간순간 걸리는 일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어요. 이건 나한테 아무것도 아냐. 괜찮아.

요즘 산에 다닐 때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암이 내게 주는 메시지였구나. 나를 돌아보라고 내 몸을 돌보고 다스리라고 그동안 계속 메시지를 보냈는데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으니 이렇게 크게 암이라는 병으로 메시지를 던져주는구나.’
암을 통해 보내온 이 메시지가 저는 너무 감사합니다. 그동안 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자식이나 가정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한꺼번에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제게 행복한 시간입니다.

월간암(癌)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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