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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아! 내 딸 시집갈 때 하객에게 같이 인사하자
고정혁 기자 입력 2011년 03월 28일 13:41분882,334 읽음

성제희(49 여) 폐암4기.

2009년 8월 26일, 비소세포선암. 폐암 4기 진단이었다. 슬하에는 스물이 넘은 딸이 둘, 그리고 마흔 넘어 내게 온 늦둥이가 이제 여섯 살이었다. 그동안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마음을 담담히 먹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슬픈 현실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폐암 4기라니, 오기로 버티면 될 것이다. 나는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처음에는 목 주변에 두드러기 같은 것이 나타나서 동네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염증약을 주며 우선 먹어보라고 처방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목 주변의 두드러기는 사라지지 않았고 동네 병원의 의사는 큰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아 보라고 했다. 부산대 병원에서 검사결과 폐에서 진행된 암이 림프를 타고 늑막까지 퍼져 있다고 의사가 설명하고는 보호자를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보호자로 왔던 언니가 의사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의사선생님이 계시는 방을 나서면서 보이는 언니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있었다. 직감적으로 의사가 해준 이야기가 준비하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었다.

치료가 시작되었다. 암이 림프와 늑막 부근까지 퍼져 있어 수술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의료진은 항암주사를 시작했는데 젬자(젬스티빈)과 시스플라틴을 섞어 주사를 맞았다. 두 달이 지나 지금 처방하는 항암제가 내게 맞지 않는다고 하여 ‘타세바’라는 먹는 약으로 바꾸었다. 다행히 타세바는 나의 암에 반응하는 것 같아서인지 지금까지도 타세바를 복용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약의 부작용은 무시할 수 없는지 몸에 알 수 없는 반응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피부에 있는 모세혈관들이 타들어가서 보기에도 흉측하고, 등이나 목 부위에 두드러기가 많이 생겼다. 변비 때문에 대변보는 일이 너무 힘들어 손으로 파내는 일도 종종 있었다.

암을 진단받고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니 폐암은 3년을 넘게 사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슬퍼서 밤이 새도록 울었다. 그리고 약을 처방받으러 의사선생님을 만났을 때 여쭤보았다.
“선생님 제가 얼마나 사나요?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이런 물음에 담당의사 선생님은 펄쩍 뛰면서 대답했다.
“지금 무슨 소리 하세요? 약 잘 먹고 잘 생활하면 나을 수 있어요!”
선생님의 자신 있는 대답은 내게 희망을 주기 위한 말인 줄 알면서도 참으로 감사했고 덕분에 웃음을 되찾는 마음의 여유를 만들어 주셨다. 이 지면을 빌어 부산대학 병원의 이민기 선생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치료받으면서 다른 것이 없나 알아보다가 지인의 소개로 야채스프를 알게 되어 더 공부를 하고자 책을 사서 읽어보니 수긍이 가는 내용이 많았다. 그래서 야채스프를 먹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하루에 5번 정도 야채스프를 먹고 있다. 그리고 요로법도 함께 병행하고 있다.

나의 일과는 이렇다. 아침 6시경에 일어나서 첫 소변을 받는다. 그리고 프로폴리스를 딱 한 방울 입에 넣고 일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소변을 야채스프와 섞어 같이 마신다. 그 후 20분쯤 후에 현미차를 먹는다. 그리고 등산을 시작한다. 등산을 하면서는 병원에서 준 항암약인 타세바를 먹는다. 주로 아침부터 점심 전까지는 산에서 생활하고 있다. 오후에는 스님에게 배운 호흡법과 함께 명상을 한다.

처음 암을 진단받았을 때 주변의 지인들이 암에 좋다는 마늘, 청국장, 토마토 등이 몇 박스씩 선물이 들어왔다. 가뜩이나 항암을 받고 나면 입맛이 없는데 암에 좋다지만 박스 채로 쌓여 있는 마늘, 청국장, 토마토를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편에게 “이거 당신 다 잡수세요.”하고는 시장으로 가 추어탕을 사다 먹었다. 또한 항암약 때문에 어질어질하고 힘든 와중인데 언니는 산에 가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무작정 나를 끌고 산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암도 힘들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위한 마음에 해주는 여러 일들이 오히려 지치고 더욱 화나게 만드는 일이 많았다.

지금 생활하는 곳은 경주에 있는 경주한마음병원이다. 이곳에서는 2009년 12월 11일부터 생활하기 시작했는데, 이 병원의 가장 큰 장점은 매 식사 때마다 야채스프를 준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곳의 야채스프는 병원에서 직접 만들어 포장하여 식당에 비치하여 누구나 먹을 수 있도록 해놓았다. 지금처럼 생활한다면 완치에 가까운 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몸의 컨디션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최상이다.

암에 걸려보니 나의 삶에 대해서 뒤돌아보게 된다.
나는 4남2녀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부산, 초량 45번지. 철거민으로 정말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전형적으로 가부장적인 분이었는데 가끔 약주를 드시고는 가족들을 힘들게 했고,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내가 집에서 밥을 했던 기억도 있다. 참으로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원래 나의 성격은 내성적이었는데 위에 오빠들이 많아서인지 차츰 남성적인 성격으로 변했고 초등학교 다닐 때는 소위 골목대장을 할 정도로 밝은 성격으로 변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학도호국단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중대장까지 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해서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나를 참으로 아껴주고 사랑해주었고 나는 남편을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맞벌이를 했다. 미용실, 피부관리실 등에서 일하면서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니 베테랑이 되었고, 암을 진단받기 전까지도 나는 피부관리실을 운영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힘든 일이 많았지만 즐거운 생활이었다.

내가 암에 걸린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우선 피부관리실 등에서 일하면서 간접흡연을 많이 했다. 또한 경제적인 스트레스를 꼽을 수 있다. 남의 보증을 잘못 서서 전 재산을 날리고,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졌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차라리 그때가 좋았구나 싶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나에게 ‘여태 고생했으니, 이제 좀 너를 돌보거라’라는 계시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늦둥이로 선물처럼 태어난 나의 딸 수민이는 내가 살아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되고 있다. 장성한 딸 둘은 어렸을 때부터 내가 많은 사랑을 주면서 키웠다. 그러나 늦둥이 수민이는 아직 내가 줘야 할 사랑이 너무 많다.
지금도 나는 내 몸속에 있는 암과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암아! 수민이 시집갈 때까지 잘 지내서 하객들에게 같이 인사하자!”
마치 기도 같지만 이러한 나의 바람은 꼭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암이 나으면 봉사를 하러 다닐 것이다. 암 진단 전에도 부산진역 앞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부산진역 앞에 가면 노숙자와 어르신들이 많이 계신다. 한 달에 두 번 밥해주는 일을 했다. 몸이 좋아지면 나의 특기를 살려 어르신들에게 무료로 마사지해주는 일을 하고 싶다.

새로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몸과 마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암을 진단받기 전의 삶도 그리 순탄한 생활은 아니었다. 특히 경제적인 문제는 너무도 힘든 현실이었다. 암과 투병하고 있는 지금은 그전의 삶에 대해서 정리하고 휴식을 취하라는 하늘의 계시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이 세상에 주어야 할 사랑이 너무 많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 내가 용기를 내야 주변의 가족과 친지들이 용기를 낼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제부터는 평생을 봉사하면서 주위의 불우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려 한다.

월간암(癌) 201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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