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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희망을 건져내다 - 첫번째 이야기
고정혁 기자 입력 2011년 03월 28일 13:39분879,666 읽음

최근수(남, 74) 가명. 담도암

잘난 것 하나 없고 부족함 투성이인 제가 누군가에게 저를 이야기하는 자체가 어색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암이라는 지독한 병마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수많은 분들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희망이 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몇 자 적을까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길고 암담하게만 느껴지던 세월이었습니다. 오직 암흑만이 존재하는 끝도 없는 긴 터널을 천신만고 끝에 빠져나온 느낌이랄까요! 아마도 이 고통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는 느낄 수가 없는 그런 것이리라 단언합니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 다르겠지만 암과 싸우는 모든 분들의 심정은 다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저의 경험담을 있는 대로 적어보겠습니다. 글의 편안한 전개를 위해서 경어를 생략하오니 너그러이 이해 바랍니다.

청천벽력 같은 사형선고-당신의 병명은 “암”입니다
2006년 정월 초하루, 온 가족이 모여 세배며 덕담이며 기쁨이 묻어나는 전 국민의 축제를 즐기고 있던 날 나는 뜻하지 않은 불청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놈은 바로 소화불량이란 놈이었다. 남원의 한적한 농촌마을(소설가 故 최명희님의 생가가 있는 혼불 마을)이 집인 나는 수십 년 세월을 논밭일로 살아왔기에 웬만한 청년들보다 더 건강하고 체력도 좋았던 터라 평소 음식도 가리는 것 없이 잘 먹고 소화도 아주 잘되는 체질이다. 그런데 이번엔 느낌이 썩 좋질 않았다. 평소 같으면 그 정도로 병원을 찾지 않았겠지만 남원시내에 있는 내과에 갔다. 단순 소화불량이라며 약을 처방해준다. 당연히 그런 줄 알았고 역시나 의사의 진단도 소화불량이란다. 집에 와서 약을 먹고 좀 지나면 괜찮겠지 했는데 이게 아니다.

다음 날, 이번엔 남원에선 꽤 유명한 그래서 늘 붐비고 오래 기다려야 하는 내과를 찾았다. 차례가 되어 진찰하시더니 보호자랑 같이 왔느냐고 묻는다. 이 무슨 엉뚱한 소리! 보호자는 큰 병 있을 때 찾는 거 아니던가! 난 그저 소화가 안 돼서 왔을 뿐인데…. 속으로 ‘이 양반 낮술을 드셨나?’라고 했다. 그런 내 표정을 읽었을 텐데 다시 보호자를 찾는다. 이 불안감은 뭐란 말인가! 아내는 직장에 갔고 아이들은 멀리 살아서 시내에 사는 장조카에게 연락하니 고맙게도 바로 달려왔다. 보호자를 확인하더니 초음파 검사를 해보자고 한다. 검사 하고나서 설명하시는데 담도 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아는 분께 부탁해 둘 테니 가서 정밀검사를 해보란다. 잠을 잘 자기로 소문난 나인데 잠이 오질 않는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내일 정밀검사를 해보면 별일 아닐 거란 위안도 해보지만 콩닥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질 않는다. 그렇게 밤잠을 설쳐버렸다.

이튿날, 아내를 동행하고 병원에 갔다. 아들딸들이 오고 정밀검사를 했다. 설 지나 일주일도 안됐는데 너무도 낯선 상황에 나 자신도 그저 황당하기만 할 따름이다. 잠시 후 의사선생님은 아들들을 불러 CT며 MRI촬영 결과를 설명하는 듯하다. 검사결과가 나왔을 텐데 나에게만은 아무런 말이 없다. 법정에 서서 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인마냥 가슴이 터질 지경이다.

한참 후, 담도에 돌이 박혔는데 수술하면 된다고 황달이 너무 심해서 일단 담즙을 빼내야 한다고 한다. 물론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사탕발림이었다. 마취를 하고 콧속으로 호스를 삽입하고 네 시간에 걸쳐 시술했다. 의사선생님은 땀에 젖었고 나는 서서히 마취에서 깨어가면서 악몽을 꾸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인데 나는 이것이 끝이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선 다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가족들에게 솔직히 얘기해달라고 했다. 오랜 망설임 끝에 암이긴 한데 옛날하고 달라서 수술하면 된다고 안심시켰다. 설마 했는데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져 왔다. 불과 며칠 사이 소화불량으로 시작된 그 끝이 암이었다니 악몽을 꾸는 듯 괴롭고 가슴이 막혀왔다. 70평생을 살면서 남을 도왔으면 도왔지 해 안 끼치고 정말 바르게 살아왔는데 그 끝이 이것이었단 말인가! 차라리 그냥 이대로 숨이 멎으면 고통스럽진 않을 것 같았다.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당신의 여명은 길어야 1년입니다
아내와 아이들과 상의를 했고 애초부터 더 큰 병원으로 가서 수술하자고 합의를 했다. 병원에 다니는 조카에게 연락하니 지체하지 말고 당장 오란다. 고맙게도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바로 진찰을 받을 수 있었다. 담당 의사는 “다행히 전이가 안 되어서 수술을 할 수가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하는 것이었다. 수술도 못하면 끝장이라 생각했는데 너무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양봉일로 바쁜 내게 병원은 그저 한가한 사람들이나 누워있는 사치였는데 참 신세가 우스워졌다. 수술할 수 있단 말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수술환자도 밀려 있고 내 나이도 있어 수술은 금방 되는 것이 아니었다. 각종 검사며 기관지 치료를 하고도 여러 날이 지나 발병한 지 근 한 달 만에 수술할 수 있었다. 여덟 시간에 걸친 징글징글한 수술, 그리고 깨어났다. 잠깐의 잠을 청한 것 같은데 수술부위가 아프고 내 몸이 말이 아니다. 내 맘대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 난 완전히 어린아이가 돼버렸다. 내일 일도 알 수 없으면서 엿장수 맘대로 ‘나중에 다 나으면 이 은혜 다 갚을게’하고 마음속으로만 다짐을 해봤다.

수술이 잘됐다고 한다. 수술부위의 통증이 심하고 힘들어서 겨우겨우 치료를 받으면서도 운동을 열심히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수술이 잘됐다는 건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전이가 안 된 줄 알고 희망을 품고 수술을 시작했는데 막상 개복을 하고 보니 간에 전이가 됐더란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원래는 담도 두 줄 중 암세포가 있는 한 줄을 제거하고 한 줄만 제 기능을 해줘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고 한다.

간에 전이된 암세포를 제거하다가 결국은 다 하지 못하고 덮었다고 한다. 재수술은 불가능하며 제일 안쪽 수술부위의 조직을 떼어내 검사를 하게 되는데 양성이면 다행이지만 악성으로 나온다면 더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마조마해 하며 지나간 일주일 후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악성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의사선생 왈 “아버님은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병행한다고 해도 길어야 1년 그렇지 않으면 6개월 남짓 사실 수 있으십니다” 했었단다. 그날 밤, 두 아들은 찜질방에서 자고 온다고 나가서는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사람들도 많은데 창피한 줄도 모르고 둘이 많이도 울었다고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살려면 철저히 바보가 되십시오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아내랑 큰아들이랑 내려오는 차 속에서 나는 내 몸에 흡혈귀처럼 붙어 목줄을 죄는 암세포의 존재도 모르는 체 수술이 잘되어 다행이라며 웃으면서 내려왔다. 그런 내 모습에 두 사람은 얼마나 남모를 눈물을 가슴으로 흘렸을까! 일단 셋째 아들네에 있기로 했다.

몸이 약해져 있으니 기력을 회복하고는 항암치료를 해야 한다기에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형님 그리고 세 동생, 며느리들, 사위들, 조카들 등 많은 사람들이 몸에 좋다는 것들을 해 나르기 바빴다. 그때의 고마움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사람 사는 냄새 물씬 나는 좋은 세상을 어쩌면 머지않아 등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두렵고 살고 싶었다.

발병하고 두 달이 되어갔다. 4월 4일부터 항암치료를 받으라고 해서 그날을 기다리며 지냈다. 그런데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는 것을 느꼈다. 아내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날짜가 다가오는데 항암치료에 대한 얘기를 일절 안 하는 것이다. 나 몰래 뭔가를 속닥이는 것 같기도 하고…. 막연한 불안함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와 아들딸, 그리고 며느리, 사위 온 가족이 다 모여 나에게 깜짝 놀랄 제안을 했다. 항암치료는 너무 힘들고 고생스러우며 간이나 담도에는 항암치료가 별로 효과가 없다 하니 다른 치료방법을 택하자는 것이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결과 ‘민속한의원’이라는 아주 유명한 한의원이 있는데 아는 분도 그곳에서 새 생명을 찾았다며 거길 가보자는 것이었다.

불안했다. 솔직히 많이 불안했다. 수술도 잘됐고 항암과 방사선 치료만 잘 받으면 된다고 했는데 왜 바꾸자는 것일까! 이 아이들이 정말 뭘 알고서 그러는 것일까! 내가 아는 우리 아이들은 절대 나를 버릴 사람들이 아닌데…. 그럼 내 몸에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비밀이 있단 말인가! 순간에 별생각이 다 들었다. 난 꼭 살아야 하니까 그냥 병원에서 하란 대로 하자고 우기고 싶었지만, 그 많은 가족들의 눈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따르기로 했다.

4월 초 민속한의원을 찾아가 원장님을 뵐 수 있었다. 진맥을 해보시더니 소음인이라며 식이요법을 병행하라며 내게 맞는 식단 팸플릿을 주셨다. 수술 후 찍었던 사진들을 자세히 살펴보시더니 그동안 나만 몰랐던 사실들을 털어놓으시며 내게 말씀하셨다.
“아버님! 살고 싶으시죠?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으세요!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거든요. 지금부터가 아주 중요해요. 지금부터는 철저히 바보가 되세요! 왜 바보들한테는 암환자가 없는 줄 아세요? 마음을 비우고 아주 편안 맘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들 다 버리시고 그동안 힘들게 했던 사람들 있다면 다 용서하세요. 그래야 사실 수 있어요. 이 암이란 놈은요, 이기려고 하면 더 덤벼요. 잘 구슬려서 다스리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알듯 모를 듯 그땐 그랬다. 내 몸이 좋은 상태가 아니기에 수술을 집도했던 최고권위의 병원 말을 안 듣고 이런 방식을 택한다는 것이 못 미덥고 불안하고 그랬다.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고민스러웠다. (다음호에 이어서)

월간암(癌) 201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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