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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물주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고정혁 기자 입력 2011년 03월 28일 13:19분879,132 읽음

고려시대에 이규보라는 문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저서로 전해져 오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안에 <문조물(問造物)>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사람이 조물주에게 질문을 하면 조물주는 그 질문에 대해서 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음은 그중 일부입니다.

사람이 조물주에게 물었다.
“대개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 사람을 내고 나서 오곡을 내었으므로 사람이 그것을 먹고, 그런 다음에는 뽕나무와 삼을 내었으므로 사람이 그것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니, 하늘이 사람을 사랑하여 살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시 나쁜 물건을 만들었습니까? 큰 것은 곰, 호랑이, 늑대, 승냥이 같은 놈이고, 작은 것은 모기, 벼룩, 같은 것들인데 이것들은 사람 해치기를 심하게 하니, 이는 마치 하늘이 사람을 미워하여 죽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조물주의 사랑함이 이렇게 일정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에 조물주가 대답하였다.
“사람과 물건이 나는 것은 모두 아득한 징조에 의해 정해져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다. 하늘도 알지 못하고 조물주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저절로 날 뿐이지 하늘이 낸 것이 아니다. 오곡과 뽕나무, 삼이 나는 것도 저절로 난 것이며, 이로움과 독함을 분별하여 처리하지 않는다. 오직 도(道)가 있는 사람은 좋은 것이 오면 받아들여 구차히 기뻐하지 않고, 독이 와도 당하여 구차히 꺼리지 않는다.”

사람이 다시 말하였다.
“내 의심이 이제 환히 풀렸습니다. 다만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늘도 스스로 알지 못하고 나도 알지 못한다’고 하니, 하늘은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니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찌 조물주님은 모를 수 있습니까?”

이에 조물주가 대답하였다.
“내가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것을 그대가 보았는가? 대개 물건은 저절로 나고 저절로 사라진다. 내가 무엇을 만들고 내가 무엇을 아겠는가? 나를 조물주라 하는 것을 나도 모르겠다.”

글의 요지는 하늘이 세상의 온갖 것들을 만들 때 어찌하여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것까지 만들었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결국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는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라 답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것들을 만든 것이 조물주의 의지가 아닌 자연의 이치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道)가 있는 사람은 분별력이 있어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구분하며, 또한 구차히 기뻐하거나 꺼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암과 투병하는 길은 가히 도를 닦는 일에 비견할 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암을 진단 받기 전의 삶은 중생의 삶이었다면, 암을 진단받은 후의 삶은 이제 도 닦을 때가 되었구나 하는 신호나 다르지 않습니다. 도를 닦는 사람이 속세를 떠나듯, 암을 진단받고 살아온 생을 돌아보게 됩니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 심적인 정리도 한번쯤은 하게 됩니다. 생과 사를 강렬히 체험하며 이전에는 지겹기까지 했던 소소한 일들이 눈물겹게 다가옵니다. 음식도 절제해야 하고, 생활습관도 바꿔야 합니다. 본인이 원해서이든 원하지 않아서든 암은 인생을 재정비하고 본질적이고 가장 깊은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암으로 오는 변화를 어떤 식으로든 정의하고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오직 고통과 절망으로 정의하기도 하고, 때로는 체념으로 정의하기도 하며, 때로는 삶의 전환으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나의 암에 대한 정의는 무엇입니까?

좋은 것이 와도 기뻐하지 않고, 독이 와서 당해도 꺼리지 않는다는 먼 옛날 이규보의 글은 우리들이 담아두고 생각할 만합니다.

암이 생긴 것이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암이라는 병이 나에게 주려고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받아 이루어야 할 도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그 도를 위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암이라는 존재는 오직 고통과 두려움만 가져다 준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규보는 조물주 또한 사람들이 자신을 조물주라고 말하는 것을 조물주 스스로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사람의 일, 누가 자신의 일을 알까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봄바람이 불면 대지가 깨어나고 가지에 생기가 돌고 땅 밑의 씨앗은 기지개를 폅니다. 모든 일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최상의 이치가 아닐까요.

월간암(癌) 201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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