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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기 - 간호하던 내가 유방암 환자가 되어
고정혁 기자 입력 2010년 04월 19일 12:34분882,355 읽음

손정숙 | 파라다이스클리닉 간호부장. 유방암.

젊은 여성이 앞에서 몹시도 서럽게 울고 있었다. 나는 용기를 주고 싶었다.
“유방은 두 개잖아요. 한 개가 없어져도…. 목숨과 바꿨다고 생각하세요.”
“머리카락이 없어도 예쁜 모자와 두건이 있잖아요. 멋쟁이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방금 진단받은 유방암 환자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젖먹이 아기도 없으니 다행이잖아요. 위나 간을 잘라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세요.”
그때 나는 최선을 다해 환자를 위로한다고 생각했었다. 종합병원의 간호과장으로, 성실한 직장인으로, 간호사의 덕목인 친절한 마음의 소유자로, 그렇게 나는 큰 행복은 없어도 나름 자신에게 만족하며 가정과 직장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환자의 입장이 아닌 내 입장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환자들에게 들려줬었다.

2002년 왼쪽 가슴에 멍울이 잡혀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으며 아, 암이구나 하고 직감했다. 의사의 입을 통해 수많은 여자들이 그랬듯이 나도 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5년 생존율……”그 뒤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고 눈물만 흘러내렸다.
나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을 가족과 친지들, 직장에서 부서장의 직분으로 자기 몸 관리를 못해 투병하는 동안 피해를 줄 것 같은 동료와 선후배들, 친척보다 더 자주 얼굴을 맞대고 소주잔을 기울이던 이웃들….
내가 며칠 전에 암 진단을 받은 환우에게 했던 말들이 반사되어 내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건 위로가 아니야!”
속으로 부르짖는 절규였다. 그때서야 괜찮다, 그래도 이정도면 다행으로 생각해라, 등의 말들이 환자에게 어떻게 들리는지를 알게 되었다. 말하는 사람이야 한 번이겠지만 마주치는 사람마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안부마다 수십 번씩 되풀이되는 말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차라리 “힘들지?”, “얼마나 속상하니?”, “참지 말고 차라리 마음껏 울고 소리쳐봐.”이런 말들이 더 위로가 되었다.

한쪽 가슴이 없는 내 몸을 거울에 비춰지는 상상만으로도 정말 수술은 끔찍하고도 끔찍하게도 싫었다. 그래서 수술을 두 달 연기해달라고 부탁하고는 그날부터 채식을 시작하며 함께 면역 증강제, 항산화제 등을 복용했다. 수술을 재촉하는 가족들을 설득해가며 두 달이 지나 초음파를 하니 2.5cm인 종양은 2.3cm로 줄어 있었다.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더는 수술을 연기하기란 무모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말리는 가족들의 성화에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후에 다행히도 림프 전이는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지만, 임파선을 제거하여 아직까지도 겨드랑이가 당기고 림프부종으로 팔은 부어있다.

시간이 지나 복막피판술을 하고 가슴 성형을 동시에 하여 가슴의 모양은 유지되고 있지만 아랫배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가로로 길게 흉터가 나 있다.

그 뒤로 직장에 복귀하고 나는 달라졌다.
지금은 우리 병원에 입원하여 투병하는 유방암 환우들에게 가슴에 남은 상처와 옮겨진 배꼽, 흉측한 가로줄을 보여주려 옷을 들추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부종이 있는 왼쪽 팔도 보여주며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항암으로 인한 고통의 깊이를 이해하고 고통을 덜어주려 애쓴다. 예전처럼 그저 위로하려 들지 않고 고통을 알기에 이해하고 느끼고 다가갈 뿐이다. 함께 아파해 줄 뿐이다.
내가 그렇듯 대부분의 환우들은 암 진단 후 인생관이 많이 달라진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감사하며 하루를 보낸다.

현재 항암 투병중이거나 진단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환우에게 부탁하고픈 말이 있다.
“암은 치료할 시간이 주어집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 원하는 치료를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다 해도 ‘자연에 순응하는 삶’으로 생활방식을 바꾸면 우선 내 몸이 달라지고, 몸이 달라지면서 생각도 변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일병장수(一病長壽) 무병단명(無病短命)”라는 옛말도 있지 않나.
암을 선생으로 삼아 그 교훈을 따르면 또 다른 삶이 있을 것이나 암이 주는 교훈을 알지 못하고 불평·불만 그치기를 멈추지 않으면 암은 화로 변해 내 삶을 지옥으로 바꿔버린다.

흔히, 암 진단을 받고나면 여기저기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며 권하게 마련이고, 가격도 만만치 않고 효과도 의심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권하는 대로 누가 먹고 나았다는 말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불가리지 않고 무턱대고 사들이다가는 집안이 보조제와 온갖 약으로 가득해진다.

“자문은 많이 구하되 판단은 스스로!”
인품이 좋은 전문가를 만나야 하고, 시기를 잘 선택해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하며, 흔들리지 않는 소신으로 노력하고 암에 대해 공부하자.
암 진단을 받고 그 충격으로 미처 암에 걸린 나를 인정하기도 전에 수술대에 오르고 두렵기만 한 항암치료를 선택의 여지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환우들의 현실이다.
내가 암에 걸리기 이전에도 힘든 줄은 알았지만, 경험하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온갖 종류의 항암으로 인한 부작용이라니. 7년이 지났건만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그 고통을 혼자 견디며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내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또 눈물이 난다.

암환우 여러분! 용기를 내세요.
너무도 착하고 사랑스런 나의 환우님들.
암에 걸린 것은 네 탓도 아니요, 내 탓도 아닙니다.
힘들고 두렵지만 우리 현실을 받아들이고 순응하고 변화된 나날을 보내며 그 속에 변화하는 모습을 그려봅시다. 하루를 더 진하게, 더 ‘찐하게’ 살아봅시다.
사랑합니다.

월간암(癌) 200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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