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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이야기] ⑵ 위암말기에 터닝포인트를 꿈꾸며
고정혁 기자 입력 2009년 07월 09일 13:27분885,731 읽음

글·김덕영 | 암환자지원센터 대표. 위암말기

“입원불가!”
계곡을 떠나 입원실로 올라가는 모악산 기슭, 서울에서는 벌써 져버린 목련이 이제 꽃망울을 맺고 있다. 누워서 왔는데도 산소 호흡기를 떼고 오니 몹시 어지러워 황토 입원실에 누웠다. 원장님의“입원불가”한 마디의 말에 어지럼증이 더해졌나보다. 서울 집 근교 호스피스 병원에 보름 후 입원예약을 하고 남도 칠백리 길을 내려왔건만 위 CT와 내시경 CD를 자세히 보신 후 원장님은 맥이 전혀 짚히지 않는다며 고개를 내젓고는 입원불가 결정을 내렸다. 전에도 나와 같은 케이스의 환자에게 응급상황이 발생하여 원장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한다. 상황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니 위 진통은 더 심해진다. 다행히도 동행한 고동탄 사무국장이 간곡히 요청하며 그동안의 나의 투병 행적을 함께 이야기하니 일단 입원한 후에 다시 결정하기로 하였다. 휴, 다행이다.

마음이 놓여 그런지 올해 1월 서울여의도 모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응급으로 실려 갔던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20여명의 가족과 친지들이 애도하는 소리가 혼미하게 들렸었다. 아들 녀석은 울며불며 이제 홀어머니에게 효도하겠다하고, 누님은 그동안 네가 죽을 때까지 신경을 못 써줘서 미안하다는 소리 등등…. 꿈같기도 했는데 그 와중에도 주변에 불과 끓는 기름, 뱀들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옥은 아니구나 하고 안심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다음 날 중환자실 면회시간 맞춰 아내가 웃으며 들어왔다. 어젯밤 12시경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 있었는데 간호사의 갑작스런 호출로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 들어가니 담당 주치의가 남편의 운명이 한 시간 정도 남았으니 보고 싶은 가족들은 빨리 연락해서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라고 했단다. 어쩐지 어젯밤 무의식 중에 주치의와 동료의사와 대화에서 누구? 음~ 사망…, 등의 말이 귀에 담겼었다. 그때 그 말이 옆 침대 할머니를 가르치는 줄 알았는데 바로 나였구나 싶다. 그 전날부터 내 침대 주위로 커튼은 사각으로 쳐졌다. 중환자실의 침대 커튼이 사각으로 둘러지면 대변, 아니면 사망을 의미한다.
항암제 말고는 해줄게 없다는 주치의의 말을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집에서 마지막을 보내기는 싫고 하여 평소 친분이 있고 암환자를 많이 경험한 전주 민속한의원장을 만나고 있다. 나 같은 환자에게 필요한 검사 장비와 의료진이 갖춰져 있기에 맘 놓고 내려올 수 있었는데, 입원불가라니…. 생각지도 못한 거절에 맘이 무거웠었다.

지금 물도 토하는 상황에서 길어야 한두 달 여명을 얘기하면서 식도 삽입 스탠드 확장술 아니면, 복부에 호스를 꽂고 식사를 공급하자고 하는데 나도 그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동안 암환자로 6년을 넘기고 암환자지원센터 대표를 역임하며 많은 환우들을 떠나보냈기에 남들과 달리 죽음에 초연하리라 마음먹었건만 막상 죽음 앞에 서고 보니 나도 별 수 없는 몸이구나 싶은 초라한 생각이 든다.
몇 개월 계속되는 토혈과 혈변으로 거듭되는 수혈과 영양제를 맞고 산소호흡기로 연명을 하다가 그 병원에서도 미안하지만 정말로 더 이상은 해줄 것이 없다고 호스피스 병동이 어떠냐고 간곡하게 퇴원을 권고했었다. 사형수는 사형장을 앞두고도 살아 돌아올 수 있지만 호스피스에서는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간 동지들을 보아서 알고 있다. 그래서 일단은 집 근처 호스피스 병원에 예약을 해놓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암환자지원센터 회원들과 함께 견학과 캠프 등을 다녔던 전북 완주의 민속한의원에 입원하기로 결정했었다.

나는 2003년 서울대에서 위암 3기 확진 후 다가오는 5월 6일이면 6년이 된다. 그동안 나름대로 관리를 잘해왔다. 그러다 작년 겨울 갑자기 많은 양의 피를 토한 후 의식을 잃고 입원했는데 하필이면 식도로 전이되었다는 내시경 결과가 나왔다.
그 뒤로 식사량은 점점 줄고 계속되는 출혈로 77㎏의 몸무게가 38㎏으로, 약 40㎏ 가량 줄었다. 우리 소모임인 망통(망가진 밥통-위암 환자)에서 흔히 하는 말로“그 양반‘게’됐어”하면 곧 죽음을 의미한다. 위암 말기에는 근육과 살이 없이 뼈만 남아 의지대로 걷지 못하고 깡통 로봇처럼 움직일 때마다 우두둑 뼈 닿는 소리가 들리며‘게’처럼 옆으로 걷게 된다.

그런데 막상 부닥쳐 보니 문제는‘게’가 된 것이 아니라 진통이다. 진통 없는 암은 암이 아니라는 말이 진저리쳐지도록 실감난다. 정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하루 20시간 이상이다. 진통과의 싸움이다. 모르핀을 비롯한 마약성 진통제, 내 경우는 주로 옥시코틴(20㎎)과 아이알 코돈(IR codon), 의사 권고 2알이지만 10알 정도 복용한다.‘ 죽음의 파스’라 부르는 마약 패치도 소용이 없다. 마약 진통제의 부작용으로 팔, 다리에 마비가 오고 온몸은 부어오른다.

호스피스 예약까지 해두고 이곳 전주의 민속한의원으로 내려오기 전, 아내에게 지인을 통해 부탁한 40년 된 산삼이나 한 뿌리 먹고 가자고 했다. 아내는 돈이 얼마인데 한 달 전에 먹고 또 먹느냐고 대꾸했다. 진통은 심하게 오는데 아내의 말에 울컥 치밀어 올랐다. 병원마다 의사들이 다 죽는다고 하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싫다 이건가 싶은 것이 아내에게 입에 담지 못할 독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내는 대뜸 이 양반이 이제 발악을 하는가 하며 내가 일본까지 가서 그 비싸고 귀한 김일성이가 쓰던 면역주사액 금당을 구해주지 않았나, 5년 동안 안 해 본 것이 무엇이 있나, 그 새에 아파트 2채를 팔았지. 그 많은 돈도 돈이거니와 그동안 쏟은 정성이 부족한가 하며 아내도 받아쳤다. 평소 내가 눈만 부릅떠도 몇 시간을 울던 아내였는데 30년 만에 이런 식으로 말대꾸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기야 아내 맘을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결혼해서 신혼부터 공부 뒷수발을 무려 12년을 하며 애들을 키웠으니 고생이야 말해 뭣하랴. 이제야 살만 하다 싶은데 또 암에 걸려 6년째 옆에서 암환자 수발을 들고 있고 이제는 과부가 될 판이니….
하지만 나의 진통은 아내의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진통이 너무 오면 판단력과 분별력도 떨어지는가 싶었다. 전주로 내려오기 전 병실에서 퇴원하기 위해 정리를 하는데 흘낏 보니 아내가 내 윗도리 주머니에서 예전 여권사진을 꺼내 자기 지갑에 넣었다. 그 사진의 용도를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며 이곳 입원실 앞 완만한 산책길을 계곡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민속한의원 원장의 배려로 입원하여 다행히 산소 호흡기 없이도 며칠을 보냈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계곡에 앉아 다슬기와 물고기를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함께 있는 환우들이 밝은 모습으로 삼삼오오 약초며 산나물을 캐러 다니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고 내심 부럽다. 나도 언젠가는 걸어서 함께 산을 오를 수 있을까.

입원 일주일. 원장님이 회진에 이제야 왼쪽 손목에서 약간의 맥이 짚인다고 하셨다. 내색은 안했지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감사합니다. 원장님. 이제 바닥에서 깊은 터널의 끝이 보이는구나 싶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한번 더 용기를 내보자. 한입 먹고 두입 토하더라도 먹어보자. 힘든 가운데에서도 행정 직원들의 세심한 배려도 감사하고, 이곳의 약차도 조금씩 먹을 만하다.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모악산 이곳에서 어떻게든 살아 내려가리라. 꼭 걸어서 내려갈 것이다. 지팡이를 집어던지고 말이다. 지금의 이 절체절명의 순간이 내 투병의 터닝포인트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월간암(癌) 200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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