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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이야기] 식도암 말기에서 희망의 증거가 되기까지
고정혁 기자 입력 2009년 06월 11일 14:32분899,500 읽음

김경식(63) | 식도암 4기

사실, 총각 때부터 위궤양으로 약을 달고 살았었다. 간헐적으로 느끼는 통증은 당연히 위 때문에 소화가 안 되어 생기는 거라고 여겼다. 막연히 몸의 어딘가 크게 고장이 나도 위가 문제가 되리라 짐작했지 식도의 문제였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뭔가 크게 이상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2003년부터였다. 3월경부터 음식을 먹으면 시원하게 넘어가지 않고 걸리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옛 어른들이 가시가 걸리면 쌈을 싸서 꿀떡 삼키라는 말이 떠올라 쌈을 싸서 먹기로 했다. 한 달가량 쌈을 싸먹어도 보았지만, 음식물을 삼킬 때 느끼는 불편함은 줄어들지 않아 그만두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음식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찾은 곳이 이비인후과였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며 내시경 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여 2004년 1월에 위내시경 검사를 받게 되었다. 의사가 ‘악성종양’이라며 무조건 큰 병원을 가보라고 한다. 악성종양이란 병명을 처음 듣는지라 무엇이냐고 재차 물었지만 의사는 대답을 회피하며 그저 큰 병원에 가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궁금해서 자주 다니는 약국에 가서 확인하니 암이라고 대답해준다. 그 소리를 듣는데 정신이 혼미해졌다. 당시 사업을 하다 실패하여 빚을 진 상태라 모든 상황이 엉망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암이라니. 가족에게 얘기할 엄두가 나지 않아 병원도 가지 않은 채로 두 달 동안 술만 퍼마시곤 혼자 속병을 앓아야 했다.

3월, 아내가 암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결국 세브란스 병원을 가게 되었다. 일주일에 걸친 검사 결과 암이 식도에서 이미 림프절로 전이가 되어 4기이며 수술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부부가 넋을 잃고 앉아있는데 종양학과 의사가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항암을 두 차례 받아서 암세포가 줄면 레이저로 치료하는 방법이 있는데 결과는 해봐야 알 수 있다고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로 입원해서 항암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항암 진행이 5일을 맞고 집으로 돌아가 3주를 기다렸다 다시 항암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항암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너무도 고통스러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가 빠지는 것은 둘째 치고 손톱, 발톱이 모두 들떠서 빠져버렸다. 입 안이 헐고 잇몸도 모두 들떠서 전에 이를 치료하려고 해놓은 보철이 튀어나와 잇몸을 찢고 혀를 찢어 해놓은 이를 모두 뽑아야 했다.

3주를 견디고 병원에 들어가서 다시 항암을 시작하니 이전보다 더 힘든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찾아왔다. 이전까지 통증이라는 것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너무 심한 통증에 모르핀 주사를 맞으며 2차 항암을 견뎌야 했다. 두 달간의 고통스런 항암을 끝내고 검사결과를 보며 외과의사가 말하길 생명 연장을 하려면 수술을 해야 하는데 현재는 그조차도 할 수 없다는 한마디를 하고는 가버렸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렇게 밖에는 안 되는구나.

그 다음 날 종양학과 의사가 아내를 불러 입원실 밖 복도에서 이야기하는데 말소리가 들려온다. 힘들다. 한 가지 방법을 시도해 봐야겠는데 위험하다. 부인은 알고나 계십시오. 항암제와 방사선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한다. 안에서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옆에 아이들이 있는데도 눈물이 나오며 견딜 수가 없었다. 항암 한 가지만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도저히 둘을 견뎌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앞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려 병원을 무작정 나온 발걸음은 저절로 병원의 기도실로 향했다. 들어가는 순간부터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우리 딸들이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 이 애들 결혼할 때 내가 없으면 누가 손을 잡고 들어가나요? 죽음을 목전에 두니 아버지 없이 결혼할 딸애들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 기도는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생명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이 시간 이후로는 병원치료는 받지 않겠습니다. 이 생명 하나님께 맡기오니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십시오. 실컷 울며 기도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결심이 굳어졌다. 그리고는 제일 먼저 방사선 치료를 위해 몸에 그려진 그림(방사선이 들어가는 부위를 표시한 선)부터 모두 지워버렸다.

그때부터 치료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약을 들고 오면 절대 안 하겠다고 물리고, 또다시 약을 들고 오면 화를 내며 약을 뒤집어 엎어버리기도 했다. 나는 퇴원을 요청했지만 퇴원은 해주질 않았다. 같은 병실의 환우들도 내게 핀잔을 줬다. 자기 몸 하나 힘들다고 처자식 생각을 하지 않고 치료를 안 받는다는 것이다. 그분들이야 내 사정과 심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그 순간 나의 한 가지 바람은 오직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치료받지 않으면 곧 죽는다는 의사의 설득과 병실 환우와 보호자들의 설득을 뿌리치고 치료거부 4일 만에 바람대로 퇴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통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항암 치료로 손톱, 발톱, 머리카락이 모두 빠졌고 입 안은 모두 헐어 침도 삼키기 버거웠으며 가슴의 통증은 몸서리치게 끔찍했다. 처참한 몰골로 집에 들어서며 나는 속으로 결심을 한 가지 했다. 내가 이 가슴에서 오는 통증을 이겨내지 못하면 자살을 하리라고. 몰래 아내와 아이들에게 각 한 통씩의 편지를 써서 몸에 지니고 있었다. 낮에는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밤과 함께 통증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밤이 오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다. 모르핀 주사로 견디던 통증은 먹는 진통제로는 효과가 없었다. 전혀 듣지 않았다. 식이요법이니 뭐니 하지만 식도암 환자인 내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먹을 수가 없으니까 무엇이든 갈아서 먹어야 했다. 그것도 넘어가질 않아서 한 모금 씹어서는 눈을 질끈 감고 겨우 삼켜야만 했다.

통증을 견디다 못해서 자살하려고 한강을 갔다. 다리 아래에 일렁이는 물을 보니 차마 몸을 던지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가슴을 치고 쥐어뜯어 가며 뒹굴다가 새벽이 되곤 했다. 그 이튿날도 또다시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시작되었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통증. 그날은 편지를 이불 속에 넣어두고 한강으로 가자마자 바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낚시하던 분들이 신고하여 자살소동은 실패로 끝이 났다.

그때가 2004년 4월 중순쯤이었다. 심폐소생술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니 편지를 읽고는 온 집안이 난리가 났다. 아내가 나를 보며 하는 말이 ‘당신 죽으면 십 원짜리 하나도 안 나온다.’라며 가족들은 당신을 살리려고 밤마다 기도하러 가는데 당신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매달리며 운다. 아내에게 남긴 편지 끝에 ‘미안하다. 이렇게 빚만 많이 지고 간다. 내가 죽으면 보험금이 육천만 원 나온다니 그걸로 빚이라도 갚아라.’라고 쓴 구절 때문이었다. 온 집안 식구가 서로 부둥켜안고 그렇게 울었다.

그러나 통증은 멈출 줄을 몰랐다. 자살하면 돈이 안 나오니 굶어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하루는 집을 나왔다. 제정신으로는 못할 것 같아 술을 잔뜩 마시고는 무작정 택시를 탔다. 기사에게 서울을 벗어나서 아무 데도 좋으니 사우나 있는 외곽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밤에 잠을 자야 하니 아무래도 사우나 시설 근처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눈을 떠보니 사우나 안이었다. 몸도 시원찮은데다가 빈속에 술을 마시고 기운이 없으니 술기운에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쓰러지니 나가라고 아우성이었다. 한밤중에 사우나에서 나와 어딘지도 모를 산에 올라가다 쓰러지고는 기억이 없다.

눈을 떠보니 세브란스 병원이었다. 삼일만이었다. 나머지 이틀은 그대로 쓰러져 있었는지, 산을 헤매고 다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누가 또다시 나를 죽음에서 건져 내었을까. 다시 항암과 방사선을 하러 입원하라는 것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의 모습이야 말해 무엇하랴. 죽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 그렇다면 어디 사는 데까지 한번 살아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살아보기로 하고 아픈 몸을 끌고 암환자 모임이며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정보도 듣는데 이것저것 물품 얘기를 한다. 병은 한 가지인데 약과 방법은 수십 가지요, 가격은 고가이니 내게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상황버섯이 좋다 하여 경동시장을 가서 물어보니 국산은 150만 원, 200만 원으로 너무 비쌌다. 북한산은 1킬로에 22만 원이란다. 중국산은 7만 원이다. 식도암에 좋다고 선물 받은 산초기름과 값이 싼 북한산 상황버섯을 먹기 시작했다.

일주일쯤 됐을까. 교회의 한 집사님이 강남에 있는 <사랑의 의원>이라는 병원이 있는데 면역주사를 놓는데 자기 처남도 받고 있는데 아무런 고통이 없고 좋다고 한다. 겨우살이라고 추출한 것이라고 한다.
그때 제일 싼 것이 40만 원이라고 하는데 보험이 되냐고 물으니 보험은 안 된다고 한다. 나로서는 돈이 없어 맞을 형편이 안 되어 돌아서서 나오는데 직원 한 분이 부른다. 가정형편이 그리 어렵냐며 그렇다면 이걸 한 번 해먹으라며 쪽지를 한 장 건네준다. 그 메모지에 적힌 내용이 야채스프 만드는 법이었다. 눈이 안 좋아서 보이지도 않는 글자가 적힌 쪽지를 들고 집으로 와 돋보기로 보니 무, 당근 등이 쓰여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이런 것보다 훨씬 비싸고 좋은 상황버섯을 먹는데 무 같은 게 뭐냐며 쪽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며칠 후에 그분에게 전화가 왔다. 먹고 있습니까? 묻기에 안 먹고 있습니다. 왜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느냐. 남들이 보기에는 흔해 빠진 것으로 보이지만 잘하면 좋은 것이라며 다시 오라고 한다. 다시 찾아가니 그분이 책과 자료를 준다. 책 이름이 <야채스프 건강법>이었다. 책을 읽어보니 말기암이 3일이면 암이 죽고 하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참, 뻥도 어지간히 세네. 그런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까. 거짓말이 분명해 보이는 그 글이 가슴에 와 닿았다. 아니 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세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으며 나름대로 계산을 해 봤다. 돈도 별로 안 들겠다 싶었다. 흔하기도 하다. 그래, 한 번 해보자고 결심을 했다.

야채스프와 현미탕을 복용 시에는 다른 약재를 같이 복용하지 말라는 내용에 처음에는 병원에서 가져온 약을 먹다가 3일 후에 약과 먹고 있던 상황버섯과 산초기름까지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병원에서 가져온 약이 총 11가지가 있었다. 위도 아프고, 항문 쪽도 문제가 있고, 입 안도 헐고 해서 종류별로 준 약이다. 고심 끝에 그중에서 위장약 겔포스 하나만을 남겨두었다.

그렇게 야채스프와 현미차를 만들어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때 통증은 얼마나 심했는지 통증이 시작되면 벽에다가 가슴을 부딪치고 주먹으로 두들기고 쥐어뜯고는 했는데 언젠가부터 참을만해졌다. 한순간이 아니라 서서히, 그리고 어느 순간 보니 견딜만해진 것이다. 정말 살 것 같았다. 야채스프 책을 열심히 정독하고 재료를 구해 만들어 가며 시간이 흘러갔다. 몇 개월 만에 죽음보다도 나를 괴롭혔던 통증은 신기하게도 사라졌다. 음식을 넘길 때 힘을 주어야 했던 것이, 영원할 것 같던 그 이물감이 사라진 것이다. 몸은 점차 변하여 몸무게가 불어나기 시작했고 힘이 붙었다.

그러던 2005년 2월,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목을 다쳤다. 병원에서 목의 이상을 검사하러 사진을 찍는데 검사실에 ‘암검사’라는 글자가 눈에 쏙 들어왔다. 의사를 만나 간단히 사정을 설명하고는 아픈 옆의 목을 찍는 김에 그러면 이 앞쪽도 같이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두려움과 기대감에 휩싸여 결과를 기다리는데 의사가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암이 하나도 안 보인다며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그때 느꼈던 희열과 기쁨은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아내는 나의 말이 못 미더웠는지 후에 병원을 찾아와 의사를 만나 직접 확인을 하기도 했다. 그 이후부터 나는 암환자라는 마음을 떨쳐버리고 씩씩하게 살았다. 나는 자신감을 얻고 암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요로법도 삼 개월 가량 했고, 벌침도 삼 개월 배웠다. 커피관장, 식이요법을 시작하고 웃음치료를 배우러 다니며 스트레칭을 하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좋은 요양병원도 찾아가 생활하면서 가장 철저하게 지킨 것은 식이요법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몸의 이상도 없고 건강하다는 느낌이 들자 조금씩 마음이 해이해져갔다. 밖에서 식사할 때면 꼭 도시락을 챙겨가곤 했는데 어느새 외식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2008년 4월, 산에서 내려오다 아귀탕을 먹게 됐는데 한 입을 먹은 것이 그대로 목에 걸려서 도통 넘어가질 않는 것이었다. 한 숟가락도 넘기지 못한 채로 병원으로 돌아왔는데 물을 마셔도 바로 입 밖으로 나와 버린다. 이전과 똑같은 증세. 밤새 잠 한숨 이루지 못하고 다음날 부랴부랴 이비인후과를 향했는데 암환자라며 받아주질 않는다.

하는 수 없이 4년 1개월 만에 세브란스 병원을 갔다. 의사는 위내시경, CT, PET를 모두 해봐야 한다고 하여 예약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와 물도 못 마시며 힘들어하는데 병원에 가기 전날, 목을 켁켁거리다 보니 막혀 있던 것이 툭 튀어나왔다. 잘됐다. 병원에 안 가란다며 좋아했더니 아내가 검사나 한번 해보자고 사정을 하는데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예정대로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보는데 뜻밖에 암이 아직 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니 맥이 탁 풀려버렸다. 여태껏 암이 없는 줄 알고 살았건만. 온몸에 힘이 풀렸다. 그런 내게 의사는 뜻밖에 기적 같은 일이라고 했다. 치료도 받지 않고 4년 동안 살아서 이 자리에 온 것도 기적이고 더 놀라운 것은 뼈, 간, 폐로 전이된 상태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이렇게 건강할 때 항암을 하자고 한다. 나는 단호히 거부하고 병원을 나와 요양병원으로 들어갔는데 나 몰래 아내가 항암치료를 신청해 놓았다. 주위 환우들은 가만히 있는 암을 왜 건드리냐며 모두 반대를 한다. 항암 치료는 받지 않겠다는 내게 의사는 방사선 치료를 권했다.

망설이다가 35회 방사선을 받고는 CT 촬영을 했는데 암이 모두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위내시경검사를 다시 해보자고 했다. 나도 내심 궁금한 것이 있어 검사를 받기로 했다. 이전에 자전거 사고로 목 부위에 MRI를 찍었을 때는 분명히 암이 보이지 않았는데 어째서 암이 보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내 식도암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니 의사가 가슴을 가리킨다. 아니. 나는 여태 목에 암이 있다고 생각했건만. 병이라는 것은 생각에 달린 것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더니 있는 암도 없는 듯이 살지 않았는가. 4년 동안 얼마나 건강했던가. 아. 마음 하나 바꾸기 나름이구나.

오늘도 나는 요양병원에서 5시 40분에 일어나 생수를 한 잔 마시고 화장실에 가서 볼 일을 보고 야채스프를 마시고 현미를 주머니에 넣고 산을 오른다. 나만의 비밀장소에서 옷을 홀딱 벗고는 발가벗은 온몸을 문지르며 떠오르는 해를 마주본다. 아니, 해를 마신다. 이때는 떠오르는 불덩어리가 꼭 내 입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다. 40분 정도 혼자 작사 작곡한 노래를 힘차게 부르기도 하고, 실컷 웃기도 하고, 기도도 드린다.
일주일에 두 번 커피관장을 하고, 점심 식사 후에 다시 두 시간 정도 산에 올라간다. 나의 취침시간은 8시 반. 다른 방 친구들이 시계추처럼 정확하게 잠자는 모습에 웃으며 TV에 나가보라고 할 정도이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살아있다는 증거를 스스로에게 보이고 싶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웃음치료 자격증도 땄다. 같은 암환우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어서다.
말기 암 환자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생활습관과 식습관을 바꾸면 암과 같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것을 꼭 말해주고 싶어서다. 힘들어하는 암환우 한분 한분의 손을 잡고 말해주고 싶다. 돈도 없고 먹을 수도 없던 나도 이렇게 건강해졌노라고 말이다.

월간암(癌) 200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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