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병수기
암대신 사랑을 꿈꾸며...
고정혁 기자 입력 2009년 04월 17일 15:51분880,029 읽음

이수영(가명)|폐암.

2004년 5월 처음 폐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처음이라고 한 이유는 이후로 재발에 재발을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해 6월 폐 상엽 일부 수술을 했고, 2년이 지난 2006년 같은 6월에 재발하여 하엽 일부를 절제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2008년 2월 폐 전절제 수술로 3번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은 3번이었지만, 재발은 4번째였습니다.

수술도 항암도 사이버나이프나 그 어떤 시술도 불가능하다고 했던 마지막 수술을 끝내고 지금은 요양원에서 환우들과 함께 즐겁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고비를 만날 때마다 늘 이겨내고 또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돌이켜보니 험난하고 힘겨웠던 지난 세월이 가져다 준 힘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에게 암은 자유를 가져다 준 감사한 존재였습니다. 암 진단 받고 머릿속에 딱 그쳐가는 첫 생각. 아, 드디어 올게 왔구나.

내 나이 25살, 남편과 결혼해서 시집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결혼 생활 6년 동안 아이 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교통사고로 남편은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뇌수술을 받고 아무런 의식이 없는 남편은 중환자실에서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내 나이 31살, 한창 때였습니다.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남편을 잠깐씩 얼굴만 쳐다보고 저는 하루 종일 병원에서 기다려야했습니다. 지금처럼 중환자 대기실도 없었던 시절이었지요. 시어머님은 제게 오직 남편의 병수발만 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순간 알 수도 없고 기약도 할 수 없는 그 때, 최악의 혹은 기적의 순간을 기다리며 7개월 동안 중환자실 밖의 계단과 병원이 제 집이고 잠자리였습니다.

일반 병실로 옮기고 기약 없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남편은 2년 반 만에 깨어났고, 2년 7개월 만에 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긴 병원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남편은 수술만 13번 받았습니다. 이어지는 합병증으로 퇴원했다가 며칠 못가 다시 입원하고 수술하기를 거듭했습니다. 26살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은 아이였습니다. 지금도 돌아보면 그 시절을 어떻게 보냈나 싶습니다.

뇌와 신경계 병동의 보호자들은 점점 찌들어 갑니다. 의식 없거나, 몸이 불편하거나, 뇌의 이상으로 문제가 있는 환자 수발도 힘들고, 애들을 돌봐줄 사람도 없고, 경제적으로는 점점 힘들어지고…. 그런데 힘들고 어려운 병원생활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게는 행복한 결혼생활이기도 했습니다. 아이가 되어버린 남편은 예전처럼 제게 냉담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냉담할 수 없었지요.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시댁 덕분에 애들 걱정, 경제적인 부분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행운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저는, 오직 남편 곁에만 있어 주는 것이 저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병원에서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거기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야 살 수 있었으니까요.

어린애처럼 웃고, 손을 잡고 있어야 하고, 자장가를 불러줘야 잠이 들고, 씻겨 주고 나면 로션을 발라줘야 하고…. 남편은 온전히 24시간 내 차지였고, 내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예쁜지 말도 못하게 예뻤습니다. 대소변을 다 받아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를 차지한 저는 그래서 행복하려고 했고 웃었고 노래를 불러줬습니다.
좋기만 했을까요? 오직 내 할 일이 이것이구나,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남편을 돌보는 이 일이구나. 남편의 간병 이외의 일은 용납하지 않는 시어머니를 거역하지 못하고, 아니 거역할 생각조차 해보지 못하고 병원에서 1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남편 침대 아래 바닥이 제 잠자리였습니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 쓰러지면 병원에 입원시키고 남편에게는 간병인을 붙여줄 망정, 저는 집에 가서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일어나면 다시 또 남편을 돌보는 일이 되풀이되었습니다. 고통스럽지만 나름대로는 즐겁게 보내려고 했고, 남편을 행복하게 웃게 해주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병원에서는 남편을 기적이라고 불렀지요.
기적이 되어 남편은 퇴원을 했습니다.

다섯 살, 일곱 살이던 아이들이 어느새 대학생이 되어있었습니다. 함께 한 시간이 없는 엄마, 엄마 손이 가장 필요할 때 안아주지 않은 엄마, 함께 공유할 추억이 없는 엄마였습니다. 성인이 된 아이들은 제게 겉돌았습니다. 하기는 누구를 탓할까요? 대학생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학교에 가본 적이 없는 엄마를요. 비가 올 때도, 소풍을 갈 때도, 입학식, 졸업식에도 온 적이 없는 엄마를요. 제게도 아이들에게도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이었지만 십 년 넘는 세월동안 엄마의 부재는 아이들에게는 너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순간에 제 삶은 의미와 목표가 사라졌습니다. 언제나 내 손이 필요했던 남편은 혼자 화장실을 가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씻을 수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설 곳도, 할 일도 없어진 저는 무력감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몰랐고, 우울증으로 병원에 다니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연한 수순이었겠지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일을 시작했습니다. 결혼 전, 미용일을 했던 경험을 살려 다시 미용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남편과의 충돌이 생겼습니다. 하루 종일 나를 찾으며 전화를 수십 통을 했습니다. 저는 미용실을 하면서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 나와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사는 그들. 세상과 단절되어 친구 하나 없이 병원생활만 한 그때 너무도 자유가 그리웠습니다. 너무도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이혼을 원하는 제게 온전치 못한 남편을 버릴 생각을 하냐며 시어머니는 완강히 반대하셨습니다.
2년 후, 암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암은 제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암? 수술하고 다 나은 줄 알았습니다. 재발을 하고서야 무서운 것이구나 하고 느껴졌습니다. 두 번 재발하고 두 번 수술하고는 정말 괜찮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아마, 너무 세게 산행을 하고 여행을 다녀 몸에 무리가 간 것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 번째 재발에 폐에는 다발성으로 암이 퍼져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간수치는 끝없이 솟아올라 항암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간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항암을 하자. 그러나 시간이 흘러 약을 먹어도 간수치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암은 커졌습니다.
너무도 답답한 데 어느 분이 사이버나이프를 해보거나, 아니면 다른 병원에 가보라고 하십니다. 용기를 내어 담당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암이 다발성이라서 사이버나이프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원이라도 없이 해보고 싶으면 해보라고 하시며 기꺼이 다른 병원을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술도, 항암도, 사이버나이프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시 토모테라피에 기대를 걸고 다른 병원을 갔습니다.
여러 과에서 모여 회의를 한다고 환자는 나가 있으라기에 복도에서 4, 50분을 기다렸습니다. 결론은 최대한으로 봐서 50% 가능성을 보고 토모테라피를 하자고 합니다. 이대로는 3개월에서 6개월밖에는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고 하니 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작용 설명을 하는데 안면근육마비에, 시력 저하 등. 앞이 캄캄했습니다. 원무과에 가서 수속을 밟으라 해서 원무과로 가니 병원 마감 5분 전입니다. 너무도 겁이 나서 이전 담당 선생님께 응급으로 전화 요청을 했습니다. 선생님께는 가만히 들으시더니 일단 접수를 하지 말고 다른 선생님을 소개시켜주겠노라 하십니다.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라며 그분은 결과지 판독을 다르게 보실 수도 있으니 한번 가보시라 하셨습니다. 성 빈센트병원 종양내과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분은 나의 암이 너무도 착한 암이라고 하셨습니다. 가봐야 옆집, 아랫집 밖에는 갈 줄 모르고 다른 동네-장기-로 멀리 가지도 않는 순하고 착한 암이라네요. 그저 크기만 조금씩 커질 뿐이었다고요. 더구나 다른쪽 폐가 너무 건강하다고. 그 병원에서도 수술팀에서는 저의 수술을 반대했지만, 그 선생님의 요청으로 다시 회의를 하고 한번 해볼만 하다고 결정되어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복은 몰라도 의사 선생님 복은 참 많았다는 생각을 지금도 합니다. 너무도 고마운 분들이셨습니다.

또 입원하여 이번에는 남은 한쪽 폐를 완전히 드러냈습니다. 세 번째의 수술. 기다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통증. 저는 간 때문에 수술 때마다 진통제를 쓸 수 없었습니다. 친정이 B형 간염 보균자입니다. 이모와 외삼촌 8분이 계신데 그중 6분이 모두 간경화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와 이모, 두 분만 생존해 계십니다. 어머니는 투병 중 쑥뜸을 알게 되어 쑥뜸을 뜨면서 30년 간경화를 안고도 건강하게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통증이 너무도 심하고 기침 한 번으로 온 몸이 흔들려도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 10년 세월만큼이야 힘들랴. 이건 며칠이면 아문다. 열흘만 힘들면 이 호스도 뺄 수 있다. 순간이야. 이 고비만 넘기자. 기적이라 부르며 남편이 일어서는 것을 보며 저는 사람의 의지력이 얼마나 강하고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지, 힘들어도 긍정적인 생각이 절망의 순간에도 온 몸의 세포를 살아나게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퇴원해서 일주일 만에 폐렴으로 응급실로 다시 중환자실로, 그때 정말 아, 때가 되었나 보다. 너무나도 고통이 심했던 그 순간에 다비식이 떠올랐습니다.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며 다비식을 치렀습니다. 내 육신이 불에 태워져서 사라지는 장면을 공중에서 지켜보는 명상을 하며 그 혹독하던 통증이 사라지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의 회복은 언제나 기적처럼 빠릅니다. 벌써 퇴원해서 아침이면 스트레칭을 하고 화장을 하고 산행을 합니다. 요양원에서도 잘 웃고 푼수때기처럼 잘 어울려 지냅니다.
이제 남은 소망은 암에 걸리지 않거나 오래 살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남은 내 인생에 한 번의 ‘사랑’이 찾아오기를 꿈을 꿉니다.

월간암(癌) 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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