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병수기
북한산 산행
고정혁 기자 입력 2009년 04월 14일 13:31분879,661 읽음

해찬들|45세. 직장암 3년째.

오늘은 나 홀로 산행을 결심했다. 장소는 북한산. 11시 5분. 북한산 매표소에서 출발했다. 산에 오르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신이 나서 정신없이 오르다 보니, 숨이라도 고르라고 주막집 스피커에서 노고지리의 찻잔이 흘러나온다.
‘너무 진하지 않는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탁자에~’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노래다. 흥겨운 반주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끄덕여 보고 발로는 박자를 맞춰본다.

11시 40분. 바위에 걸터앉아 집에서 가지고 간 감자떡 2개와 바나나 하나를 먹었다. 숲 속에서 청설모 한 마리가 입에 솔방울처럼 생긴 것을 물고 가다가, 유심히 보는 나를 보더니 앞다리를 들고 꼬리로는 중심을 잡고 옆 눈으로 나를 힐끔 바라본다.
“요즘 뭐 먹고 사냐?”했더니 새침데기처럼 고개를 휙 돌리더니 숲으로 도망을 간다. 청설모가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을 했을 것이다.
“요즘 너희가 밤과 도토리를 다 주워가서 먹을 것이 없어. 올겨울에도 겨울잠 자면서 속이 쓰려 위장약 먹을 것 같다. 왜?”

산 중턱쯤 왔다. 다리도 아프고 점점 힘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수술하고 거의 2년 동안 운동도 못했더니, 숨이 턱까지 차고 힘이 빠지면서 옷이 땀에 흠뻑 젖었다. 힘이 들수록 ‘난 할 수 있다.’를 속으로 외쳤다. 큰 바위 밑에는 사람들이 소원을 빌고자 쌓아 놓은 탑들이, 똥침을 놓을 듯이 옹기종기 모여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다른 분들한테 쪼끔 미안한데 내가 워낙 급해서, 엄지 손톱만한 작은 돌멩이를 맨 위에 살짝 올려놓고 소원을 빌었다.
‘우리 아버지 건강하게 해주시고, 내 아내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시고, 우리 식구들 건강하게 해주시고, 내가 가진 병도 낫게 해주세요.’

숨이 가빠진다. 뒤따라오던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제치고 앞서서 나간다. 백운대 0.9km란 팻말이 보인다. 잠시 쉬고 있는데 금발머리에 작은 체격을 가진 남자 미국사람이 올라온다. 오랜만에 영어 회화도 해볼 겸, 해서 말을 걸었다.
“하이.”
“하이.”한다.
‘역시 아직은 영어 발음이 녹슬지는 않았구나.’
아까부터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얼음물이 녹지 않아서 먹지 못했다. 가만히 둘레를 둘러본다. 바로 옆에는 남자들이 있고, 한참 위에는 아주머니들이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몇 발자국 더 가서, 남자들을 제치고 아주머니한테 쭈뼛거리며 물을 얻어먹었다.
위문을 지나서 백운대 밑에 도착했다. 태극기가 있는 정상까지는 가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지럼증이 있는데 무리를 해서 올라가다가 발을 헛디뎌 “축 사망”하면 안 되지. 다들 요즘 경기도 어려워서 조의금도 없을 테니….

백운대 바위 중턱까지 올라갔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이다. 태풍이 온다더니, 날도 흐리고 바람도 세차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보잘 것 없다. 저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려고 발버둥을 칠까?

1시 08분. 가방을 열었다. 김밥, 감자떡, 바나나와 물을 꺼내놓고 김밥을 젓가락으로 들었다. 김밥이 통째로 올라온다. 맨 밑에 있는 김이 썰어지지가 않아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할 수 없이 손으로 들고 입으로 뜯어 먹었다.
30분쯤 쉬고 조심조심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쭉 빠진다. 내리막길이라 자기 맘대로 다리가 움직이려고 한다. 그러면서 후들거리기 시작한다. ‘휴,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힘이 많이 드는구나.’

나무도 잡고 바위도 잡으면서 한발 한발 내디뎠다. 그러면서 내가 해냈다는 것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혼자 싱글벙글 웃으면서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도 했다. 내려오는 중간에 둘레를 살피면서 영역표시도 해놓고. 주막 근처에 왔다. 막걸리 냄새가 난다. 시원한 막걸리에 김치 한 조각!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혼자 한잔을 마시고 남기기도 그렇고 해서 참기로 했다.

4시가 조금 넘어 집 앞, 화정역에 도착했다. 낮부터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많이 내리기 시작한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딸에게 전화가 온다.
“아빠, 어디야. 아직도 산이야.”
“아니, 집에 거의 다 왔어.”
“혼자 산에 갔다가 온 거야?”
“응”했더니 “아빠! 대단한데”한다.
마지막으로 ‘오늘 온종일 끝까지 참고 견디어준 내 뱃속과 똥꼬’ 고맙다.

월간암(癌) 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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