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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순댓국
고동탄(bourree@kakao.com) 기자 입력 2024년 06월 20일 15:49분677 읽음
글: 김철우(수필가)
석수역에서 시작된 시흥대로는 도로의 종착지인 대림삼거리에서 여의대방로와 신길로로 그 이름을 바꾼다. 그 후 여의대방로는 보라매역과 대방역을 지나 여의도로 이어지고, 신길로는 신풍역을 지나 영등포 로터리로 향한다. 대림삼거리에는 지하철역이 없어 역세권에서 멀어지며 그 지운(地運)을 잃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교통 요지의 역할은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그 대림삼거리에 이름난 순댓국집이 있다. 과거 과수원이 있던 곳의 지명이 와전되어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는 상호는 한번 들어본 사람에게는 낯설어 오히려 기억하기 편하다. 지난 1957년 개업하여 2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순댓국 전문 식당이다. 다들 비법을 궁금해하지만, 냉동고기가 아닌 국내산 생고기를 직접 삶아서 잡내가 없는 육수를 만들고, 순대와 고기를 듬뿍 넣어 손님상에 내는, 옛날 방식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비법이라면 비법. 조금 더 편한 방식을 좇다 보니 온전히 전통을 따르는 것이 비법이 된 것이 아이러니하다. 점심시간을 한참 지나 방문했는데도 손님으로 가득한 테이블을 보면 재료의 선도(鮮度)나 식당의 수익이 눈에 보인다.

배추김치와 깍두기, 고춧가루를 넣은 새우젓 그리고 된장과 함께 청양고추가 국밥보다 먼저 손님을 만나 식욕을 자극한다. 한눈에 봐도 담근 지 얼마 되지 않은 김치는 군내 하나 없다. 특히 눈길을 잡는 것은 새우젓. 종지가 아닌 종발에 담긴 새우젓은 붉은 고춧가루와 뽀얀 젓갈 색과의 조화 때문인지 보기만 해도 침샘이 반응한다. 순댓국 좀 먹어본 사람이라면 새우젓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으리라. 제철에 맞는 싱싱한 새우젓이 순댓국의 맛을 좌우함은 물론이다. 순대와 고기를 찍어 먹는 소스이기도 하며, 밥을 말며 생기는 국물의 싱거움을 보완하는 것 또한 새우젓이다. 그러니 작은 종지에 내는 것보다는 종발에 내는 것이 내용물의 중요성이나 역할에 어울린다. 작은 것 하나에서 음식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는 것 같아 마음이 몽글해진다.

순댓국이 나왔다. 테이블 위에 놓인 뚝배기는 아직도 불 위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손님상 위에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것일까. 무엇이 부족하여 갈망하는 것처럼 넘치기라도 할 기세로 맹렬히 끓어오르다 이내 사그라진다. 좀 더 가라앉히려고 숟가락으로 몇 번을 휘젓다 보니 뚝배기에 담긴 고기와 순대가 한가득하다. 먹기 전부터 배가 아닌 가슴이 먼저 포만감으로 불러온다. 다진 양념 반 숟가락을 넣고 저으면 뽀얀 국물이 어느새 입맛을 당기는 붉은 빛으로 변하고, 뱃구레 깊은 곳에서 시작된 행복감은 화산이 폭발하듯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다. 한입에 넣을 수 있는 최대치의 양을 숟가락에 올려 깍두기와 함께 한술 뜨면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샌다. 행복이란 결국 배를 채우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일까.

순댓국이란, 지극히 서민적인 음식을 파는 이 식당에서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면 나이가 다채롭다는 것이다. 중년 부인들 모임 자리가 보이는가 하면 내가 앉은 자리의 대각선 방향에도 서른을 갓 넘겼을 법한 처자 혼자서 순댓국에 소주를 마시고 있다. 순댓국이란 노인이나 노동자들이 하루의 고단한 일상을 풀어내고자 생각해내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기야 힘든 입시와 취업, 결혼, 출산 등 삶의 높은 파고를 헤쳐 가며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의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그들도 피곤한 삶을 위로해 줄 무엇인가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런데 아까부터 감정의 경계선 위를 위태롭게 걷는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그 처자가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큭~’ 하는 소리와 함께 급격하게 기울어지는 상체. 손에 들린 잔 속의 소주는 또 다른 파고를 만들고 주위의 시선은 순간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진다. 산다는 건 테이블 위에 놓인 청양고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운 일이다. 삶이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 진흙탕의 삶 속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은 본인밖에 없다는 것을 쓴 소주잔을 기울이는 이곳의 손님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어떤 위로나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일이다. 자신이 무너졌던 과거의 일들을 회상하며, 눈물을 떨구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 볼 뿐이다. 누군가 뜨거운 국물에 눈물 몇 방울을 섞는다 해도, 훌쩍이는 소리가 손님들의 귀를 파고들어도 얼핏 눈길 한번 주는 것으로 그만이다.

마지막 잔을 힘차게 입에 털어 넣은 그녀가 일어선다. 어느새 눈물은 마르고 이제는 꽤 씩씩하기까지 하다. 다시 상처 입은 세상에 나가 싸우려나 보다. 뱃속을 든든히 채우고 나니 힘이 나는 걸까. 알코올 탓에 다소 비틀거리는 듯 보이지만, 세상에 맞서 싸울 정도의 용기는 있을 것 같다. 야전병원을 나서는, 완쾌되지 않은 부상병처럼.

‘부디 승리하기를. 세상과 싸우는 것이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란 것을 잊지 않기를.’

이곳에 앉아 보니 순댓국이란 것이 그저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 서민들의 울분과 회한을 풀어주는 음식이란 것을 알겠다. 속이 빈 사람보다 마음이 허한 사람이 더 많이 찾는 곳. 가슴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 스스로 보듬으며 홀로 다가오는 곳, 추억과 온갖 실수의 후회들을 바닥에 던져놓고 쓴 소주를 들이켜는 곳. 그리고 마침내 옷을 털고 다시 있어서는 곳이 아닐까. 그래서 비보다 바람이 더 차가운 날이면, 나는 대림삼거리를 찾아가고 있을 것이다.
월간암(癌) 202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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