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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소매 끝에 묻은 얼룩
고동탄(bourree@kakao.com) 기자 입력 2023년 11월 02일 15:43분1,142 읽음
글 : 김철우(수필가)

날은 좀처럼 개지 않았다.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앞에 둔 머릿속처럼 세상은 온통 뿌연 안개 속에 갇혀 있었다. 이런 날은 누군가가 집채만 한 고무호스 끝을 오므렸다 펼치며 끊임없이 안개를 뿜어대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산만 한 부채를 부치며 이 안개를 다 날려버릴 때까지 경쟁하는 거라고. 그래서 안개를 만드는 사람이 이기는 날엔 검은 구두를 신은 거인이 쿵쿵거리며 다가와 나를 잡아갈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어린 날의 내게 있었다. 다 지난 겨울날의 안개, 이런 날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배를 타는 일이었다. 서산을 지나면서 시계가 트이는 걸 보니 안개가 걷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맑은 날은 아니었다. 나이 스물을 갓 넘기며 발을 내딛기 시작한 세상의 첫 모습처럼. 태안반도 남서부의 끝이며 서해로 가장 깊숙이 들어가 있는 안흥항(安興港)은 그렇게 흐려 있었다.

신진대교를 지나 새로 건립된 안흥외항(外港)에서 유람선 표를 끊고 보니 출항하려면 아직 한 시간여가 남았다. 새벽에 일어나 허겁지겁 아침을 한 탓에 조금 이른 시간임에도 허기가 몰려왔다. 횟집 간판만이 줄지어 선 항구에서 혼자 식사하기에 알맞은 굴밥집 안내판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홀로 바닷길을 따라 여행을 다닌 탓에 이젠 혼자 하는 식사에도 이력이 났다. 더구나 현지의 주민에게 내가 계획한 일정과 여행지를 마음 편히 협의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식사 중의 일정인 것이다. 어리굴젓과 양념간장을 넣어 비벼 먹는 굴밥 한 그릇의 성찬은 근래 드물게 기억할만한 식사였다.

출항하려면 아직도 십여 분이 남았다.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앵글을 맞추고 있다. 주요 피사체는 역시 정박해 있는 선박. 선박은 사진 속에서 의외로 파스텔 색조의 색감을 낸다. 놀라운 일이다. 오늘처럼 흐린 날, 바다에 반사된 햇빛이 바다색 보다 옅은 파스텔 색조의 빛을 만들어 배에 그려 넣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군가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들을 보면 내 생각이 난다고 했었다. 내게서 바다 냄새가 나느냐고 웃고 말았지만 사실 그건 혼자 여행하는 자들만이 만들어내는 가슴속 진동(振動) 같은 것이었다. 배와 내가 함께 만들어내는 공명(共鳴)에, 그도 한쪽 가슴에서 울림을 감지했기 때문이리라.

배는 흐린 바다를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다. 배의 난간에 몸을 맡긴 채, 출항하는 순간의 미세한 흥분을 즐기고 있다. 낯선 곳, 낯선 바다 위의 배에 오르는 일. 그건 온전히 새로운 세계다. 이 순간은 미지(未知)에의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오른 가슴을 진정하느라 애를 먹곤 한다. 배 위에서 항구의 모습을 담고 있던 순간, 카메라 앵글에 괭이갈매기가 들어왔다. 내게서 먹잇감을 기대한 모양이다. 손을 뻗으면 닫을 듯한 거리까지 왔다가 이내 돌아간다. 아…! 그 표정 없는 퀭한 눈이란…. 1년 전 소매물도를 향하는 배 위에서 꿈에 나온 갈매기가 떠올랐다. 그 갈매기는 ‘자유’였다. 내 무의식 속에서 갈매기는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새는 자유로울까. 갈매기를 보자 문득 이 생각이 떠올랐다. 하늘을 날며 새는 자유를 만끽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것을 제외하고 철저히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구속에의 저항’ 그것이 인간의 본질은 아닐까.

신진도의 안흥외항을 출발한 배는 어느덧 가의도를 지나 안흥항으로 귀항하고 있다. 안흥항이 백제시대부터 당나라 무역항으로 사용된 유서 깊은 항구로, 앞으로 군산에 버금가는 항구로 발돋움할 것이라는 안내방송이 낡은 스피커의 쇳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1시간 반 일정을 돌아보니 섬 주민들의 장수를 기원한다는 거북바위와 멀리 중국 땅을 바라보며 태안반도를 지켜준다는 사자바위, 뭍으로 떠나는 여자들을 머무르게 하려고 제를 지내던 여자바위, 물살이 빠른 곳에 있는 코바위, 물개들을 볼 수 있는 정족도 그리고 가의도 동쪽에 있는 독립문바위와 돛대바위 등이 태안 최고의 해양 관광 명소로 각광받을 수 있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언젠가 다시 안흥항에서 배를 탄다면 안흥팔경(安興八景)의 하나인 안흥낙조를 선상에서 보리라.

603번 지방도를 타고 태안읍으로 향하다 연포해수욕장이란 표지판을 보고 차를 돌렸다. 길이가 2 Km쯤 되는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송림과 기암괴석이 장관이다. 나무 벤치와 소나무 오솔길 그리고 바다 위에 떠 있는 솔섬을 묶어 그대로 내 방에 걸어두면 어떨까. 그렇다면 1년 내내 바닷냄새와 솔 냄새 그리고 바람을 느낄 수 있을 텐데…. 바다를 향한 저 나무 벤치에 같이 앉을 동행이 한없이 그리워진다.

연포해수욕장을 지나 채석포항으로 들어섰다. 그물을 수리하는 사람들 옆으로 잘 정리된 그물과 바다 위로 배들이 한가하게 떠 있는 조그만 항구의 모습이 안흥항의 혼란스러움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다. 이런 항구에 살면 시간이 느리게 가지 않을까. 작고 평화로운 공간 속의 시간은 왠지 더딜 것 같다. 그런 비밀을 발설하지 않으려는 듯 채석포항의 사람들은 모두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태안읍까지 나갔다가 다시 원북면으로 길을 잡았다. 기실 태안의 바닷가는 어느 곳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지만, 특별히 국내 유일의 사막이 있는 신두리를 다시 보고 싶었다. 신두사구. 길이 3.4 Km, 폭 0.5~1.3 Km로 국내 최대 규모인 35만여 평의 해안사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해류에 의해 운반된 모래가 쌓여 형성된 이 사막 주변은 해당화의 군락지이기도 하다. 혼자 사막 한 가운데 서 본다. 바다가 만들어 놓은 사막 그러나 이곳에서 두 팔을 벌리면 바람이 만져진다.

서해안 3대 낙조 중 하나라는 꽃지해변에 도착하니 슬픈 전설을 간직한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 너머로 붉은 해가 스러지고 있다. 세월이 얼마나 빨리 흘러가는지 알고 싶다면 낙조 사진을 찍을 일이다. 자신이 원하는 사진을 찍고 싶은 순간은 단 몇 초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낙조 사진을 찍기 위해 늘어선 사람들은 늘 허둥대기 마련이다. 세월은 그렇게 빠르다. 선유도의 낙조가 생각났다.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선유도의 낙조에 비해 꽃지해변의 낙조는 여러 가지의 색이 동시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무엇이 더 아름답냐고 묻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하늘을 배경으로 흰 구름이 부채처럼 펼쳐지고 주황색과 노란색이 중앙의 해를 감싸 안고, 붉다 못해 흰 태양이 검은 안개 띠를 밀치며 떨어지고 있다. 아주 짧은 순간 세상은 모든 빛을 노을에 주고 만다. 그래서 온통 검은 상복(喪服)을 입고 애달파 만장(輓章)을 내어 걸었다.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에 있는 사람들이나, 꽃다리 위에서 있는 사람들이나 모두 꽃처럼 아름다우니 해넘이를 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낙조며 자연이다.

이 낙조 아래에서는 외롭다는 말조차 현란해진다. 그러니 침묵하라. 이 순간 그저 우리가 자연임을 알면 그뿐이다. 자고 갈까. 깨끗한 모래 위에 누우면 저 붉은 노을은 이불이 될 텐데….

고운 모래는 그대로 술상이 되고 대작(對酌)하는 것은 바다, 달 그리고 노을이다. 첫 잔은 바다에게 먼저 주었다. 두 번째 잔을 따르니 달이 먼저 술잔 속에 들어가 있다. 술잔을 채운 건 난데 마시기는 달이 마신다. 다시 한 잔 따르자 이번에는 풍덩하고 노을이 먼저 들어가며 소매 끝에 붉은 얼룩을 만들어 놓았다. 왠지 이 얼룩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월간암(癌) 202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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