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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새가 울자 해가 뜨고
구효정(cancerline@daum.net) 기자 입력 2023년 09월 27일 14:22분1,530 읽음
글: 김철우
차는 남해고속도로의 순천나들목을 나와 17번 국도에 들어서고 있다. 여수(麗水)로 향하는 이 길 위에서 ‘순천만’이란 이정표를 보자 잠시 고민에 빠졌다. 들렀다 갈까. 863번 지방도와의 분기점이 다가오자 한숨처럼 해가 지던 와온해변이 그리워졌다. 물만 정화(淨化)하는 줄 알았던 갯벌이 사람의 마음도 정화한다는 것을 안 것은 순천만을 다녀온 후였다. 그러니 17번 국도를 달리며 순천만에 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여수 오동도까지 남아 있는 거리를 알려주는 작은 이정표를 보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내일 향일암에 올라 일출을 보려면 오늘 향일암 아래의 임포마을까지 가야 한다. 오동도와 돌산공원을 들르면 결코 여유 있는 시간은 아니다.

오동도 입구에 차를 세우고 서방파제에서 동백 열차를 탔다. 768m 나 되는 긴 방파제를 걷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만든 열차의 이름으로, 국내 최대의 동백꽃 군락지인 오동도를 홍보하기 위해 지은 이름 같은데,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동백꽃을 생각하면 오동도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 같다. 1월 중순, 그것도 평일의 오동도는 예상대로 한산했다. 동백 열차에서 내려 섬의 정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길을 잡는 것은 시누대 터널. 대나무보다 가늘고 마디가 뚜렷하지 않아, 연(鳶)을 만들거나 과매기를 꿸 때 그리고 화살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알았는데 이렇게 숲을 이룬 것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그 옛날, 정절을 지키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진 여인을 위해 지아비는 오동도 기슭에 무덤을 지었는데 그해 겨울부터 여인의 붉은 순정은 동백꽃으로 피어나고, 푸른 정절은 시누대로 돋았다는 오동도의 전설이 터널의 입구에 비문처럼 서 있다. 시누대 터널 속으로 한발 한발 걸어 들어갔다. 누구를 기다리다 그리되었는지 긴 시누대 끝이 굽어 하늘을 덮은 것이 마치 창공을 향해 나부끼는 주둔군의 깃발 같다. 시누대 터널에는 대나무 숲과는 다른 바람이 부는 것일까. 대나무 숲에서 느꼈던 바다 소리보다는 훨씬 처량한 소리가 난다. 그저 끝 모를 기다림에 지쳤을 뿐인가. 시누대는 울고 있는 것 같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던 그해 겨울에도, 이순신 장군에 의해 화살로 만들어져 왜군의 심장을 향해 날아가면서도 시누대는 이런 소리를 냈을까. 시누대 숲을 서성이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는데 귓가에 매달린 소리가 그리움이 되어 길 위에 ‘툭’ 하고 떨어진다.

시누대 터널 옆으로 지난 8월 통영의 한산도에서 본 팔손이나무가 큰 손을 벌리고 있다. 잎은 7~9개로 갈라진 손바닥 모양이고, 잎을 욕탕에 넣어 류머티즘에 이용한다고 해서 그때도 신기하게 바라봤는데 오동도에서 다시 보니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팔손이나무 옆으로 보이는 것이 동백나무 군락지. 만발한 동백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삶의 절정의 순간에 몸을 던져 땅을 덮은 동백꽃의 낙화를 볼 수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오동도의 하얀 등대에 올라 시야 끝까지 펼쳐진 남해군의 섬들과 돌산도의 모습들을 보고 내려와 용굴 가는 길에 동백나무 터널을 만난다. 바다로 향한 길 위에 나무 널판을 깔고 길옆으로 동백나무가 호위하듯 만들어 놓은 터널을 달리면 그대로 푸른 바다를 향해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잔디광장에 내려와 거북선과 판옥선을 구경하다 그만 동백 열차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칠백여 미터나 되는 방파제를 터덜터덜 걸었다. 사람들도 거의 빠져나간 오동도의 방파제 위로 이름 모를 새가 앉았다가 푸드덕 날아가고 오동도를 바라보고 있는 자산공원 너머로 해가 진다. 방파제를 걷는 동안 공원의 위쪽 하늘이 붉게 변하더니 점차 어둠에 밀려가고 있다. 내일 새벽에 향일암에 올라 저 해를 다시 보리라.

오동도를 나와 돌산도를 향하는데 이미 해는 져서 마음은 바쁘지만, 여수의 야경을 놓칠 수 없어 돌산공원에 올랐다. 섬이었던 돌산도를 육지와 연결한 연륙교인 돌산대교는 교각에 설치한 조명으로 인해 형형색색의 빛의 향연이 펼쳐지고 여수항과 여수 시내의 야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여수항 앞으로는 왜구를 무찌른 이량장군의 방왜축제비가 있어 장군도라 불리는 섬이 여수의 수호신처럼 서 있고, 해안가 카페의 불빛은 꺼질 줄 모르고 여수를 밝히고 있다. 어둠과 함께 달려온 바람이 추위를 몰고 온 탓에 손을 비비며 사진 몇 장을 담고 돌아섰다.

돌산대교에서 향일암이 있는 임포마을까지는 약 삼십 분쯤 걸리는 거리다. 아직 저녁을 하지 않아 시장기가 느껴졌지만 임포마을에서 여수의 특산물인 갓김치를 맛보고 싶은 마음에 서두르기로 했다. 전라남도 수산종합관이 있는 무술목을 지나며 차는 가로등도 없이 좁은 길로 접어들고 있다. 날이 흐린 탓인지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창문을 열어보면 바다 냄새는 나는데 도대체 어디가 바다인지 어디가 하늘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어 마치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 위를 달리는 느낌마저 든다. 외진 곳이라 오고 가는 차들도 없이 중앙 차선 위에 반사되는 불빛에 의지하여 달려가고 있다. 도심에서야 이제 겨우 저녁을 마칠 시간이지만 이 길 위에선 이미 시간이 멈춰버린 듯 적막감만이 온몸을 휘감는다. 동행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 무렵, 멀리 임포마을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향일암으로 오르는 입구에 있는, 가장 최근에 건축된 것으로 보이는 민박집에 방을 얻고 새우와 게 등 해물이 잔뜩 들어간 된장찌개와 톡 쏘는 돌산 갓김치로 배를 채우고 나자, 내일 새벽의 일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미리 알아본 내일의 일출 시각은 7시 36분. 그렇다면 6시경엔 일어나서 준비를 시작해야 하고, 새벽 해풍을 맞으며 가파른 계단을 사십여 분이나 오르려면 일찍 자야 한다.

여섯 시에 맞춰둔 알람 시계의 목소리가 제법 크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카메라만 준비하고 밖을 나섰다. ‘암자가 떠오르는 해를 향해 있다’는 향일암(向日庵). 백제 의자왕 4년인 644년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어 낙산사의 홍련암, 남해 금산의 보리암, 강화도 보문암과 함께 우리나라 4대 관음 기도처로 꼽히는 이곳은 해돋이와 자연경관이 뛰어나 관광객으로 늘 붐비는 곳이다. 계단 초입에 거북이 두 마리가 사람들을 맞이하고,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까지 이어지는 계단을 한발 한발 올라가며 흘리는 땀방울은 남해의 푸른 바다를 지나온 해풍이 씻어주고 있다. 계단을 오르다 뒤돌아보니 왼쪽의 조그만 봉우리의 모습이 영락없는 거북의 머리다. 산의 이름 역시 쇠 금(金)과 큰 바다거북 오(鼇)자를 쓴 금오산이니 지금 오르고 있는 향일암은 금거북이 등에 진 부처님의 경전쯤 될까. 대웅전 앞 난간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고 향일암에서의 일출의 백미라는 원효(元曉)대사의 수도 도량인 관음전(觀音殿)으로 다시 발길을 옮긴다. 대낮에도 전등을 밝혀야 하는 어두운 바위굴을 지나 관음전 앞에 서니 세상의 끝에 다다른 듯 저절로 긴 탄성이 터져 나온다. 백여 미터의 절벽 밑으로 망망대해 남해가 발아래라. 인간 세상의 모든 고통을 듣고 도와준다는 관세음보살상의 은은한 미소가 세상에 번지고, 그 뒤로 선혈만큼이나 붉은 동백꽃 몇 송이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동백나무로 둘러싸인 관음전의 주련(柱聯)에 ‘한 잎 홍련이 바다 위에 떠 있다(一葉紅蓮在海中)’라고 쓰여 있는데 향일암이야말로 고해(苦海)의 가운데에 떠 있는 붉은 연꽃 같은 존재가 아닐까.

다시 관음전의 바다를 향한 난간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해가 뜨려면 아직 몇 분이 남았지만, 모두가 엄숙한 얼굴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누구는 카메라를 꺼내 들고, 다른 누구는 바다를 향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모두가 말을 잊은 사람들처럼. 이 순간만큼은 지금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고 있는 것 같다. 일출 시각은 다가오는데 야속하게도 구름이 너무 짙어 해가 보일 것 같지는 않다. 한순간, 절벽 틈에서 자라난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이름 모를 새가 울자 멀리 하늘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하늘은 조금 더 붉게 변하고 그 위로 흰 구름 띠가 보이더니 하늘은 다시 노랗게 변해갔다. 어디서 불었는지 한 줄기 바람이 관음전의 풍경(風磬)을 흔들고 지나가자 오늘 해돋이를 보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아쉬움 가득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십 원짜리 동전 하나씩을 등에 지고 바다를 향해 앉아 있는 거북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임포를 나와 다시 돌산대교로 길을 잡았다. 돌산도의 성두, 작금, 군내, 항대, 평사로 이어지는 해넘이 드라이브와 굴구이를 먹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항아리처럼 오목한 방죽포 해수욕장의 부드러운 은모래와 무인도를 배경으로 몽돌밭이 펼쳐진 무술목 해변을 보며 마음을 달랬다.
17번 국도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길. 창밖엔 홍합 양식장의 흰 부표들이 보이는 듯하고 오동도의 시누대 터널을 배경으로 향일암의 새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 다시 와야겠다. 동백꽃의 분분한 낙화를 보지 못해서도 아니고, 향일암의 일출을 보지 못해서도 아니다. 거문도, 백도, 초도 등 여수의 아름다운 섬들을 보지 못해서는 더욱 아니다. 여수에 마음 한구석을 두고 온 모양이다.

월간암(癌) 202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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