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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茶山草堂)을 오르며
구효정(cancerline@daum.net) 기자 입력 2022년 11월 30일 10:52분2,349 읽음


글: 김철우(수필가)

300m. 다산초당 입구에서부터 다산초당까지 지도상의 거리는 300m였다. 평지라면 3분 남짓한 거리. 경사를 짐작할 수 있는 등고선도 초당에서부터 정상을 향해 그려져 있었다. 전날 초당 근처의 황토방에서 따뜻하게 몸을 지지며 느긋할 수 있었던 것은 만덕산 골짜기가 아무리 험해도 300m 거리는 쉽게 오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가 점차 굵어지더니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한 손에는 우산, 다른 한 손에는 촬영을 위한 장비까지 들었다. 이제 팔의 힘을 빌리지 못하고 오롯이 무릎의 힘만으로 초당까지 올라야 한다. 더구나 바위뿐만 아니라 길 위로 모습을 드러낸 나무뿌리까지 물기에 젖어 미끄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빗소리에 다급해진 새소리가 귀를 파고드는 아침, 초당 가는 길은 그렇게 시작됐다.

조선의 초기 천주교 유입과정에서 깊은 역할을 한 것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년∼1836년) 가문이었다. 그러나 엄격한 당시 사회에서 천주교의 교리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터. 1801년 신유박해 때 큰 매형과 셋째 형이 참수를 당하고, 다산은 강진으로,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 1758년∼1816년)은 흑산도 유배길에 오른다. 11월 9일, 두 번째 유배길에 형제는 함께 한다. 화를 당한 가문을 뒤로하고, 네 살 위 형에 의지한 채 함께했던 유배길. 훗날 두 사람이 나눴던 편지에서 이 열흘간의 유배길에서의 피붙이를 향한 애틋함이 묻어난다. 그렇게 열흘의 시간이 지나 나주 율정(栗亭)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제 밤이 지나면 이별이다. 나이 마흔을 갓 넘은 형제는 갈리는 길 위에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제일 미운 것은 율정 주점 문 앞길이 두 갈래로 난 것’이라던 다산의 시에서 당시의 심정을 엿본다. 그러나 다시 만나리라던 두 사람의 바람과 달리 나주 율정에서의 이별은 다시 만나지 못할 헤어짐이 되고 만다.

다산이 강진 땅에 발을 들이고 첫 번째 머문 장소는 사의재(四宜齋)라고 불리는 강진읍 주막이었다. 다음이 고성사의 보은산방 그리고 제자 이학래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이 1818년 9월에 해배(解配) 되었으니 10년의 세월을 이곳 다산초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 활동을 한 것이다. 18년간의 유배 생활 가운데 10년을 기거한 다산초당을 빼놓고 다산의 유배를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다.



유배길에 오른 지 8년, 다산이 네 번째 거처할 곳을 찾아 오르던 그 길을 따라 나도 비를 맞으며 걷고 있다. 어느새 우산을 든 팔엔 힘이 빠지고, 숨이 가빠온다.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위를 바라본다. 산에 오르는 사람이 자꾸 목적지를 찾는 것은 이미 지쳤다는 것. 빗물인지 땀인지 얼굴을 덮는 것을 간신히 손등으로 훔쳐내면 산길엔 빗물에 젖은 나무뿌리만 하얗게 빛난다.

이 길을 걷던 다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어린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제 집안은 몰락하고 온통 반대파만 득세하는 세상에서 가장 의지해야 하는 형과도 떨어진 신세. 몸 하나 누일 곳을 찾아 이리저리 거처를 옮겨야 하는 처지가 처량하기만 했을까. 산책길처럼 쉬이 걸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비에 젖은 산길에서 몸은 무거워진다. 바위를 디뎌야 할지, 나무뿌리를 디뎌야 할지, 나무뿌리 사이의 땅을 디뎌야 할지. 어딜 디뎌도 미끄러지거나 접질릴 수 있어서 발길은 허공을 헤맨다. 조금 완만한 길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온통 나무뿌리가 드러난 길이 펼쳐진다. 시인 정호승이 ‘뿌리의 길’로 명명한 그 길이다.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라고 노래한 그 길이다.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아직도 땅을 움켜쥔 나무의 핏줄에 힘이 느껴진다.

뿌리의 길이 끝나는 곳에 무덤 한 기가 보인다. 다산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윤종진의 무덤이다. 다산이 이곳 초당에서 저술 활동을 했을 때 18인의 제자 역할이 컸는데, 특히 초당에 거처를 마련한 윤규로의 아들인 윤종진 형제를 아꼈다고 한다. 몸이 작고 약한 윤종진에게는 책까지 써주며 분발을 응원했다고 하니, 이제 세월이 흘러 스승이 머물렀던 초당 입구에서 제자가 호위하는 역할을 하는 듯하다.

무덤을 지나자 다시 돌부리들이 앞을 막아선다. 하나같이 날카로운 돌부리의 하늘을 향한 기세가 사납다. 경사는 이미 급해져 빗물이 넘쳐흐르는 소리도 커졌다. 어디를 디뎌야 할지 눈으로 한참을 앞서간 이후에 발을 뗄 수 있었다. 잘못 디딘다면 미끄러지거나 흘러내리는 물의 기세에 발이 젖을 수 있는 상황. 다산도 비슷한 상황에 부닥쳤으리라. 그리고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은 자연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산길 바로 옆으로 물이 흐른다. 물의 발원지를 알 수 없지만, 차를 좋아했던 다산 역시 이 물로 차를 마셨을 것이다. 물소리가 커질수록 다산과 가까워짐을 느낀다.

돌부리 길을 지나자 경사 심한 계단이 펼쳐지며, 나무 사이로 목조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계단 하나의 높이가 생각보다 높아 몇 개의 계단을 오르고 숨을 고른다. 그리고 조금씩 선명해지는 초당의 모습에서 힘을 얻는다. 드디어 제자들이 유숙하며 학문을 토의하던, 다성각(茶星閣) 현판이 붙은 서암(西庵),을 지나 초당 앞에 선다. 초당 안에 놓인 다산 영정이 ‘수고했다’며 웃는 듯하다. 아무도 없는 아침의 다산초당에서 다산을 만난다. 새소리, 바람 소리만 만덕산을 가득 채운다. 세상을 향한 원망, 반대파를 향한 분노, 화를 입은 가족에 대한 애달픔 그리고 붕어한 선대왕과 형제에 대한 그리움 등이 엉킨 실타래처럼 얼마나 다산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을까.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꺾이지 않는 개혁에의 의지를 떠올리자 저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차 끓이던 약수인 약천(藥泉), 차를 끓였던 다조(茶竈), 다산이 직접 바위에 새긴 글자 정석(丁石), 초당 옆 연못의 물고기를 바라보던 관어재(觀魚齋)와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인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등을 돌아보니 다산의 곧은 품성과 유배 중에도 차를 즐기며 연못에 잉어를 키우는 등 낭만과 풍류 또한 즐겼던 것 같다. 이곳에서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고발하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지은 목민심서(牧民心書), 국정에 관한 일체의 제도 개혁에 대해 쓴 경세유표(經世遺表), 죄수에 대하여 신중히 심의(審議)하는 흠휼(欽恤) 사상에 입각하여 재판하라는 흠흠신서(欽欽新書)를 포함하여 500여 권에 달하는 실용서를 펴내는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 정치 권력에서 밀려난 천재 실학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아니었을까. 더구나 그가 유배길에 오르지 않았다면 위의 저서들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사회적 업적과 개인적인 불행을 바꾼 역사의 아이러니를 본다. 하긴 ‘만약 그가 조선의 영의정에 앉아 있었다면 일본은 조선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라는 동경대학교 한 교수의 논문도 있다고 하니 역사에서 가정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지만….

다산이 이곳에서 누렸을 즐거움이 하나 더 있다면 바로 세상을 비슷한 경지에서 바라보는 친구였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백련사 혜장선사를 빼놓을 수 없다. 유교나 주역에도 조예가 깊은 학승인 혜장선사는 다산보다는 나이가 열 살이나 아래지만, 혜장이 나이 마흔에 세상을 등질 때까지 친분을 유지했다. 특히 혜장선사는 차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터라 고문으로 피폐해진 다산의 몸을 치료하는 것은 물론, 차를 제대로 즐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주변에 차가 많이 자라는 다산을 그대로 호(號)로 사용하였고, 혜장선사에게는 아암(兒菴)이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산길을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나기 위해 분주히 왕래하였다고 하니 산속에서 벗을 만나 대화하거나 기다리는 즐거움을 만끽하지 않았을까.

다산초당 건물은 이미 다양한 매체에 소개된 까닭에 익숙했지만, 막상 앞에 서보니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기와집이 자못 낯설다. 산속 유배지의 기와집이라니…. 본래 초가집이었는데 다산이 떠난 후 관리되지 못해 무너진 것을 1950년대에 기와집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더구나 흑산도로 유배된 형을 그리워했을 곳에 세워진 천일각(天一閣) 역시 일대를 정비하며 세워진 것이라니 역사를 대하는 편의적 시각에 못내 입맛이 쓰다.

다산의 숙소이며 장서를 보관하던 동암(東庵) 옆으로 난 길이 백련사로 이어지는 길이다. 보통의 걸음이라면 30분쯤 걸리는, 다산과 혜장선사가 서로를 만나러 오갔던 길. 이 길을 따라 백련사에 들렀다가 다시 돌아와야 할지 망설인다. 멀리 강진만의 물빛이 남빛으로 반짝이는 게 보인다.
월간암(癌)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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