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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에세이[에세이] 경호임정예 기자 입력 2022년 08월 11일 16:07분2,312 읽음
- 글: 김 철 우(수필가)
아무리 노력해봐도 성(姓)은 기억나지 않았다. ‘경호’라는 이름만 기억날 뿐이었다. 그런데 비틀거리는 내 기억 속에서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바로 녀석의 얼굴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심한 곱슬머리 그리고 작고 처진 눈이 항상 능글맞게 웃는 표정을 하고 있던 녀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떤 것은 또렷이, 또 어떤 것은 희미하거나 또 전혀 떠올릴 수 없는 것이 녀석에 대한 기억들이었다.
녀석을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6학년 봄날이었다. 아침 조회 시간에 담임선생님의 뒤를 따라 들어온 녀석은 첫눈에 봐도 모범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건들거리는 태도도 그랬지만 인사를 하는 순간에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웃음기를 잃지 않던 녀석은 장난기를 넘어 약간의 불량기마저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반 전체의 아이들이 더 주목했던 것은 담임선생님의 표정이었다. ‘학교생활이 불편하지 않도록 도와주라’는 의례적인 말씀을 생략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도무지 밝은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친구들과의 내기에서 진 벌칙을 받는 표정의 담임선생님은 녀석의 자리를 정해주는 순간 절정에 달했다. 녀석이 앉을 수 있는 빈자리는 두 곳이었다. 친구 하나가 전학을 가면서 빈 중간쯤의 자리와 혼자 앉아야 하는 맨 뒷자리. 녀석의 키를 생각하면 당연히 중간쯤의 자리를 줘야 했지만, ‘저기 맨 뒤’라고 말하는 담임선생님의 목소리와 표정은 단호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예의 그 눈웃음을 하며 자리로 걸어가는 녀석의 뒤통수에 쏟아진 담임선생님의 한마디는 녀석의 정체를 포함한 모든 의문이 한순간에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여기서는 얌전히 있어!”
그렇게 시작된 녀석의 학교생활은 첫인상과는 사뭇 달랐다. 거리를 두려는 반 아이들의 행동도 한몫했지만, 녀석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나서는 법이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낯선 환경 탓이라고 생각한 아이들은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고, 녀석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히 등하교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녀석이 공부에 열중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중요한 과제를 안 하거나, 교과서를 안 가져오는 일도 있었고, 수업 시간에 받은 쉬운 질문조차 능글맞은 웃음과 뒤통수를 몇 번 긁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기도 했었다. 간혹 고개를 돌려 녀석을 봐도 공부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으로 수업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쯤 흘렀을까. 아이들은 녀석이 ‘사슴 우리에 잘못 들어온 사자’가 아님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나 역시 녀석을 ‘공부에 관심은 없지만, 크게 말썽을 피우지는 않을 친구’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녀석의 건들거리는 태도로 보아 과거 한두 번의 ‘일탈 경험’쯤은 쉽게 예상이 됐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학교생활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우리 생각의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한 가지 녀석에게 변화가 있었다면 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나였다.
녀석이 왜 나를 선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수업 시작과 끝에 선생님께 인사를 선창하던 나를 선택했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처음에는 대화라기보다는 접촉 같은 것이었다. 웃음을 머금고 내 책상 주변에 와서는 어깨를 툭 치고 자기 자리로 돌아서는 것이 전부였다. 말도 없이. 그렇게 몇 번을 시도하더니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놀이를 제안하기 시작했다. 약한 경상도 사투리로 ‘옛날에 살던 동네에선 이런 놀이 했는데……’ 하며 내 의견도 묻기 전에 놀이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기억으로는 녀석이 제안한 놀이를 단 한 번도 같이 해본 적이 없다. 항상 같았던 내 대답은 ‘그러고 놀았어?’라며 한번 웃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은 완곡한 거부였고, 내 의도를 녀석도 재빠르게 알아차렸다. 녀석이 제안한 놀이를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6학년이 놀기엔 왠지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본 것은 녀석의 웃음 속에 스치듯 보였던 어색함이었다. 어색한 미소. 녀석의 웃음은 능글맞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번은 점심시간에 식사를 마치고 옆자리에 앉은 녀석이 “넌 여자가 뭐라고 생각해?”라고 느닷없이 질문했던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아이가 대답하기에는 낯설기 짝이 없는 이 질문에 나는 당황하여 “여자?”라고 대답이 아닌 반문하는 것으로 얼버무렸지만, 녀석은 스스로 정의 내리기를 하고 있었다. “여자는 말이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그냥 남자들에게 피해만 보는…….”
오후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녀석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이 녀석은 어떤 경험을 했기에 벌써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있는 그 순간이 길게만 느껴졌었다. 그 후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한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아니 이것이 녀석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러나 경호가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슬픈 가족사를 내게 고백하기 시작했었다는 것을 열두 살의 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사도 나눌 수 없었던 녀석과의 이별은 너무나 급작스럽게 그리고 충격적으로 찾아왔다. 경호가 전학 온 지 석 달쯤 흘렀을까. 하루도 빠짐없이 출석하던 녀석이 이틀째 무단결석을 하고 있었다. 녀석의 집에 전화도 없어 연락할 방법을 찾지 못한 담임선생님께서 ‘오늘은 방문해야겠다’며 아침 조회를 마쳤다.
그날은 본격적으로 장마가 시작된 날이었다. 먹구름이 온통 하늘을 덮더니, 정오 무렵부터는 뇌성벽력을 동반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기세가 얼마나 세던지 운동장을 때린 빗줄기가 흙과 함께 다시 튀어 오르는 것이 수십 미터 떨어진 교실에서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오후 수업을 막 시작하려는데 누군가 급히 교실 문을 열고 담임선생님을 찾았다. 불안과 슬픔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담임선생님의 얼굴을 스쳤다. 그리고 그것이 경호에 관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녀석의 죽음. 그리고 서울에 연고가 없는 이유로 사망자 신원을 확인해 달라는 경찰의 요청이었다. 사건은 이랬다.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가출로 이어진 가족의 해체. 그리고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 가난으로 인해 누나가 경호를 포함한 동생 둘에게 독약을 탄 우유를 먹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날 오후는 무거운 적막감만 교실을 짓누르고 있었다. 천둥소리에 숨겨 가까스로 훌쩍이는 소리만 가끔 들려왔고,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들킬까 봐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과 헤어진 지 사십여 년이 흘렀다. 지금 녀석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졸업앨범에서조차 얼굴을 찾을 수 없는,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녀석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녀석의 일탈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들뿐이다. 경호는 내게 아주 조금씩 다가왔었던 것 같다. 조금씩 자기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우리 만남이 너무 짧았고, 너무 어렸다는 것이 아쉽지만.
열두 살의 초등학생이 답을 내놓기 어려웠던 그 ‘정의 내리기’나, 제안했던 놀이를 함께했더라도 녀석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겠지만, 지금도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땅 위를 튀어 오르던 빗줄기처럼 내 가슴을 두드리는 것은 녀석이 그때 수없이 내게 던졌던 구조요청을 이해하지 못했던 미안함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미안한 마음으로 인해 아직도 녀석을 붙잡고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또한, 비록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지만, 녀석이 죽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에게 측은지심을 일으키게 했던 존재였다는 것도. 이제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르며 너를 보낸다. 경호.월간암(癌) 202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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