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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상(石上) 오동나무
고동탄(bourree@kakao.com) 기자 입력 2022년 04월 15일 11:59분3,506 읽음
글: 김철우 | 수필가

몇 해 전 전통 현악기를 만드는 명장(名匠)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내가 발행하던 잡지의 인물 취재를 목적으로 최예찬(태귀) 명장의 작업장을 방문하여 사진 몇 컷을 담은 후 그의 작품을 모아 놓은 응접실에서 마주 앉았다.

전통 현악기 제조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제조의 어려운 점은 어떤 것인지, 장인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외롭고 힘든 과정을 어떻게 견뎠는지 등을 묻고 대답을 들으며 나는 엘 시스테마(EL Sistema)를 떠올렸다. 베네수엘라 경제학자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가 조직했던 엘 시스테마의 정식 명칭은 ‘베네수엘라 국립 청년 및 유소년 오케스트라 시스템 육성재단’으로, 음악을 이용하여 마약과 범죄에 노출된 빈민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엘 시스테마를 통해 음악을 접하게 된 빈민가 아이들은 마약을 끊는 것은 물론 정식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기도 했다.

내 삶의 터전인 구로구에도 다양한 환경의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있다. 특히 학교에 갈 나이가 다 되어서 한국에 들어온 아이들은 언어 문제와 그에 따른 학력 저하로 인해 외톨이가 되거나 어두운 곳을 찾기 마련이다. 이 아이들이 한국에 적응하여 한국을 사랑하도록 돕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일 것이다.

그래서 엘 시스테마와 같은 일을 함께해 보자고 명인에게 제안했다. 아이들에게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통해 한국의 전통을 가르치고, 국악을 통해 우리의 얼을 배워나간다면 빠르게 한국문화에 젖어 들 것이라고 설득했다. 물론 엘 시스테마와 같은 시스템을 이뤄 원하는 성과를 내기에는 많은 난관이 있겠지만, 시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최 명장 역시 무릎을 치며 반겼다. 그 뒤 코로나19로 인해 눈에 띌만한 진행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으나 앞으로 봉사활동으로 이어질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최 명장과의 인터뷰에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바로 전통 현악기 제조에 필요한 재료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야금이나 거문고 제조에 많이 쓰이는 나무는 오동나무인데, 특히 좋은 소리를 내는 오동나무에 대해 듣게 되었다.

첫 번째가 벼락 맞은 오동나무로 급속한 건조과정을 거쳐 일반 오동나무와는 다른 소리를 낸다고 하고, 두 번째 수변(水邊) 오동나무 역시 물속에서 자라 잔잔한 성질에 물결 흐르는 듯한 깨끗한 소리를 낸다고 한다. 마지막은 석상(石上) 오동나무인데, 돌 틈에 뿌리를 낸 오동나무는 나무 질이 무른 일반 오동나무와 달리 촘촘하고 단단해 강하면서 깊고 맑은 소리를 낸다고 한다.

이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석상 오동나무다. 자신이 선택해서 돌 틈에 뿌리를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양쪽에 날개를 단 가벼운 씨앗 하나가 갈바람을 타고 내린 곳이 우연히 돌 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처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을 것이다. 바람에 꺾이지 않으려고, 비에 쓸려가는 흙을 단단히 잡으려고 남들보다 더 단단히 몸을 만들고 뿌리를 더 깊숙이 내려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깊고 맑은 소리를 내는 오동나무가 된 것이다.

석상 오동나무 이야기는 그대로 우리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수년 전 자수성가하여 크게 부자가 된 사람들과 가난하게 된 사람들을 나눠 스스로 생각하는 이유를 조사한 적이 있다. (황수남의 『살며 생각하며』 중에서, 누리달 刊) 그런데 이유가 참 흥미롭다. 가난하게 된 사람들은 그 이유를 ‘첫째, 부모가 가난해서 둘째,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해서 셋째, 건강이 좋지 않아서’라고 대답했다. 부자가 된 사람들의 이유 또한 ‘부모가 가난하거나, 고등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건강이 좋지 못해서’라고 대답했다. 놀랍게도 이유는 똑같았다.

부자가 된 사람들은 부모가 가난하니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더 많이 노력했고, 또 고등 교육을 못 받았으니 더 많이 배우려고 밤낮으로 노력했고, 건강이 안 좋으니 건강하게 살려고 죽을 만큼 노력했다고 한다. 그들은 남을 탓하거나 운이 없는 인생을 괴로워하며 삶을 허비하지 않았다. 석상 오동나무처럼 남들보다 단단히 몸을 만들고 뿌리를 더 깊숙이 내리는데 집중한 것이다. 같은 환경에서 이리도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은 결국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 말고 다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번 세기는 젊은이들이 정보를 독점하는 시기라고 한다. 지난 세기까지는 오랜 삶의 경험을 통해 정보를 차근차근 축적하여 이를 토대로 부(富)를 획득했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막대한 양의 정보를 짧은 시간에 얻을 수 있어, 그 정보를 이용해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을 통한 수많은 정보 속에서도 위와 같은 지혜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다양한 삶의 족적을 남겨야만 가능해 보인다. 나 역시 적지 않은 고난 속에서 좌절하며 살아온 기억이 있지만, ‘고난이 기회의 다른 말’일 수 있다는 것은 이제야 어렴풋이 수긍하는 정도이니 말이다.

최 명장이 들려주는 오동나무 가야금 소리를 듣는 내내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품고 삶에 충실하다 보면 남들과 다른 향기를 내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이제 누구라도 힘겨운 삶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고 생각되면 마음이 단단해지도록 주문을 걸듯이 불러보자.
‘석상(石上) 오동나무’
월간암(癌) 2022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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