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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 중 다행 찾기
고동탄(bourree@kakao.com) 기자 입력 2022년 01월 04일 18:29분4,254 읽음
일과를 끝내고 집에 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다 저녁을 먹고 동네 앞 산책길에 나섭니다. 아파트 단지 앞으로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데 양옆으로 근사한 산책길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대략 1시간 정도 걸을 수 있는 코스가 있는데 날은 어둡지만 가로등이 환하게 길을 비추고 있어서 밤이라 해도 산책을 하는 데 큰 무리는 없습니다. 간혹 좁은 산책길로 자전거가 지나기 때문에 한쪽으로 바짝 붙어 다른 사람이나 자전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차분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밤 9시를 넘겨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산책로는 한산했고 간혹 자전거를 타는 무리가 뒤에서 앞으로 추월하여 지날 뿐입니다.

귀에 들리는 음악과 함께 아름다운 길을 보면서 산책의 즐거움을 느끼는 중이었습니다. 이어폰을 꽂고 있어서 세상은 눈으로만 볼 수 있었으며 음악은 눈으로 보는 세상을 더욱 멋지고 감동적인 풍경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알 수 없는 충격으로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 후 아스팔트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잠시 몇 초 동안 정신을 잃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전해진 큰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신 후에 쓰러진 채로 상황을 파악하려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는데 누군가 내 옆에 와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괜찮냐며 몸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로 보이는 몇 명의 학생들이 119에 연락을 하려 하는데 지금의 위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몰라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3 학생들로 학원이 끝난 후 머리를 식힐 겸 친구들끼리 자전거를 타는데 저와 부딪힌 학생은 앞서 길가로 걷는 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전속력으로 달려와 부딪친 것입니다. 어린 학생들이 공부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는데 사고가 생긴 것입니다. 저는 우선 몸 상태를 점검했습니다. 왼쪽 발은 감각이 없어졌으며 몇 미터 정도를 날아가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지면서 어깨와 무릎에 찰과상을 입어 출혈과 함께 통증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바퀴가 왼발 뒤꿈치를 타고 올라갔는데 다행히 골절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발등이 서서히 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전화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차로 태우러 오라고 부탁을 합니다. 나와 부딪힌 학생은 어찌나 놀랬는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무릎 꿇고 울기만 했습니다. 어찌나 크게 울던지 “아저씨 안 죽었어! 그만 좀 울어!”하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찰과상을 입은 곳을 소독하고 연고를 바릅니다. 왼발은 부어올라 대야에 얼음을 부어 찜질을 시작하면서 속으로 생각합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충격에 비하면 몸의 상처는 병원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될 정도이며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없어질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정형외과에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부목과 목발을 처방하는 것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다고 합니다.

살다 보면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을 계획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암과 같은 병과 함께 살아갈 계획을 세우지도 않습니다. 그런 일들은 갑자기, 순간적으로 삶 깊숙이 파고듭니다. 마치 어디선가 핵폭탄 날아와 세상 한가운데서 폭발한 것과 같은 위력으로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킵니다.

평지풍파 없이 고요한 일상을 지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복은 없어 보입니다. 아무런 사고도 없이 주변 사람들이 모두 건강하고 나 자신도 무탈하게 마지막을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요. 그러나 언제든 사고가 생기기도 하고 재난이나 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그런 일이 애초에 없으면 좋겠지만 만약에라도 불행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생긴다면 지혜롭게 그것들과 마주하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들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행스럽다고 여겨지는 것을 찾고 있다면 이미 불행은 더 이상 불행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산책길 사고는 컸지만 다리도 부러지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며 다행스러움을 느꼈을 때 이미 사고는 지난 일이 됩니다.

며칠 전 알고 지내는 지인에게 모처럼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자기 동생이 외국에 있는데 유방암을 진단받았다고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섞인 목소리를 냅니다. 상황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니 아직 검사 중이라 정확한 것은 모른다고 답합니다. 그러면 상황을 정확하게 알게 되면 그때 다시 의논하자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연락이 왔을 때 아직 초기라 수술로 치료할 계획이라는 말을 합니다.

저는 최근 의학 발전을 설명하면서 그 정도면 앞으로 20년 이상은 더 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안을 전합니다. 20년이 지나면 동생의 나이가 70대 중반을 넘을 텐데 그 정도면 된 거 아니냐며 농담을 던지니 그제야 웃음 띤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유방암은 불행이지만 아직 초기라는 다행스러움이 있으니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수술이 끝나면 항암이나 방사선 치료와 같은 요법들을 계속해서 진행할 수 있겠지만 최근 유방암의 완치율은 90%를 넘었으며 생존 기간 또한 10년을 넘고 있습니다. 병원의 치료가 끝나고 건강한 생활 습관을 배우고 유지하면서 관리한다면 유방암의 진단은 오히려 더욱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변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불행이 닥쳤을 때 그 속에서 다행스러운 것을 어느 하나라도 찾는다면 불행은 우리에게 어떤 계기를 만들어 주며 삶의 변화를 이끌어 더욱 발전적이며 건강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만듭니다.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 때, 또 심각한 병이 생겼을 때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상황을 파악한 후 불행 중 무엇이 다행스러운 일인가를 찾는다면 더 이상 불행에 이용당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 삶의 시간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래전 돌이킬 수 없는 말기암을 진단받은 분과 대화를 나눈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분은 암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으니 자신에게 시간을 주어서라고 합니다.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며 정리할 수 있었으며 주변을 돌아보고 남아 있는 가족에게 고마움과 당부를, 자신에게는 미지의 세계로 여행할 준비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마주하고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많은 울림을 줍니다. 불행이 닥쳤을 때 아무리 찾아봐도 그 속에서 다행스러운 것을 찾지 못한다 해도 불행을 맞이하는 방법에 많은 차이가 있으며 지혜롭게 불행을 대하는 그때의 그분을 생각하면서 삶이 힘들 때마다 큰 용기가 되곤 합니다. 불행이 닥쳤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들여다보며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태도는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삶의 지혜가 아닐까요.

또다시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구적인 전염병 때문에 아직 힘든 시간이 남아 있지만 그 속에서도 다행스러움을 찾는 힘을 잃지 않고 한 해를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월간암(癌) 202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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