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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중독되다
고동탄(bourree@kakao.com) 기자 입력 2021년 07월 07일 18:48분2,950 읽음
중년을 넘어서면서 몸과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격에 따라서 별일 아닌 것처럼 이 시기를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시 한 번 사춘기가 찾아온 것 같은 감정의 변화를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갱년기는 사춘기와 마찬가지로 호르몬의 변화에서 비롯되는데 보통 여성이 겪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성별을 가리지 않습니다.

남자들도 노쇠한 몸을 느끼며 울적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공허한 마음 때문에 극도의 고독감을 느낍니다. 사람의 외로움은 혼자 있어서 생기는 게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이 없어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갱년기가 되면 이제 힐링이라는 작업이 필요해집니다. 그리고 힐링은 가끔 중독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때 생기는 중독은 위안과 함께 즐거움을 주며 평생의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보통 중독이라고 하면 좋지 않은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중독은 인생을 망치고 삶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담배나 술 혹은 마약이나 도박과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중독을 찾게 되면 활기차고 즐거움으로 갱년기를 채울 수 있습니다. 갱년기 이전에 즐겼던 중독이 나를 위협하는 행동들이었다면 나이가 들어서 무언가를 주기적으로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즐거운 중독일 수 있으며 그러한 것을 찾는다면 더욱 건강하고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어릴 때부터 북한산이 지척에 있는 동네에 살면서 제대로 올라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산 아래나 근방을 돌면서 산책을 하는 정도였으며 굳이 힘들게 꼭대기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등산에는 취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체력을 키우면서 동시에 몸의 건강과 마음의 건강도 챙길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늘 보이는 북한산에 눈이 갔습니다. 사람은 매일 변하고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릅니다. 어제까지 저 산은 그저 병풍 속에 있는 그림이었지만 오늘 아침은 오르고 싶은 대상이 된 것입니다.

북한산은 바위 봉우리가 많습니다. 그 중에 높다는 축에 속하는 봉우리는 두 개인데 백운대와 인수봉입니다. 인수봉은 로프와 같은 장비가 있어야 오를 수 있기 때문에 백운대를 목표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안내 표지판은 북한산성입구에서부터 4킬로미터라고 알려줍니다. 4킬로미터는 일반인이 보통 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 걸으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내심 ‘뭐 별거 아니구먼! 빨리 갔다 오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큰 착각이라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 몸으로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군대에 있던 시절 이후로는 산에 오른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아마도 한창 젊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얕잡아 보았던 것입니다. 그때의 몸과 지금의 몸은 30년의 시간을 두고 많이 달라져 있었는데 기억만이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 않다고 고집을 부린 것입니다. 산행을 시작하고 돌산 앞에 서서 숨이 멎을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어떤 스님의 말씀은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했었는데 산과 물은 어릴 적 그대로이지만 내 몸은 변하여 산 앞에서 천근만근입니다.

더 큰 숨을 쉬고 싶은데 얕은 숨만 쌕쌕거리게 됩니다. 몸은 더 많은 공기를 원하지만 작은 폐는 감당할 능력이 떨어져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낡고 출력도 낮은 고물 자동차가 에어컨을 켜고는 높은 언덕을 올라가는 중입니다.

4킬로미터 중에서 1킬로미터도 오지 않았는데 눈을 들어 앞을 보니 하얀색 거대한 돌산이 천국으로 향한 계단처럼 거대한 높이로 솟아 있습니다. 계단과 돌길로 만들어진 등산로에서 한 발자국 움직이고 잠시 쉬고 다시 두어 발자국 오른 후에 잠시 쉬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땀은 온몸을 적시고 정신은 혼미해집니다. 산에 오르기 전에 표지판을 보면서 들었던 의기양양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생 근처에 살면서 소풍을 제외하고는 이 산에 오른 적이 없는데 무슨 생각으로 정상을 향해 오르기로 결심을 한 건지, 또 지금의 고통스러운 호흡과 허벅지와 종아리, 발바닥에서 보내오는 통증 때문에 계속 주저앉아 쉬고 싶은 마음만 드는 자신에게 실망스러울 따름입니다.

중턱 쯤 올라 긴 휴식을 취하면서 주변을 둘러 볼 여유가 생겼습니다. 등산은 어르신들이나 하는 취미생활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팀을 이루어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언뜻 보아도 20~30대의 젊은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홀로 산행을 하는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나도 좀 더 일찍 시작할 걸 하는 후회가 듭니다.

저 아래쪽에서는 말 그대로 기어서 올라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마도 나와 같은 초보일테지요.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 같은 경사로 길은 계속됩니다. 바로 앞만 쳐다보면서 한 발자국씩 꾸준히 걷다보니 어느새 숲속이었던 산은 하늘 위가 되었습니다. 발 아래로 다른 산봉우리와 도시가 보입니다.

바람은 시원하고 새가 창공을 날아갑니다. 백운대 정상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해냈다는 성취감에 가슴이 뿌듯해지면서 하늘을 날고 있는 기분을 느낍니다.

왕복 8시간 동안 산행을 했습니다. 집에 와서는 온몸이 쑤시고 몸살이 난 것처럼 아팠는데 샤워를 하고 막상 잠을 청하려고 누우니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은 더욱 또렷해집니다. 다음 주에 다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첫 번째 산행 후에 일주일에 한 번 북한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산행 후에 느끼는 개운함은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으며 여태 이런 즐거움을 모르고 살았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15년 전 쯤 십여 명의 암환자들과 함께 등산모임을 만들어 산행을 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도 가끔 참석하였는데 그때는 젊었고 산에 대한 맛을 몰랐습니다. 또 암과 투병하는 분들이라서 험하지 않은 산을 골라 산책하듯 걷는 등산을 했었습니다. 등산이 아니라 바람을 쐬러 다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런 모임이 만들어진다면 힘들게 땀 흘리며 등산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암이 장벽을 만들어 편안한 것에만 안주한다면 건강에 대한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는 분들이라면 산에 올라 발 아래에 있는 세상을 바라보며 하늘 위에 떠 있는 기분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건강한 중독이 있다면 바로 산에 중독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월간암(癌) 202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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