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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편지 - 다 쓰고 떠나라
고동탄(bourree@kakao.com) 기자 입력 2019년 03월 04일 11:09분5,434 읽음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가죽을 남긴다.”
어릴 적 학교에서 선생님께 자주 듣던 말입니다. 속담을 들려주신 후에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위인들의 생애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본받아 위대한 사람이 되라는 교훈을 주고 싶으셨겠지요. 그리고는 호연지기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지금도 학교에서 이와 같은 교육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사람 이름과 호랑이 가죽에 대한 기억은 커서 큰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마음 깊이 남았습니다.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은 우리의 눈을 높은 곳으로 향하게 합니다.

최근 혼자 살다가 쓸쓸히 임종을 맞이한 동대문에 사시던 할머니에 대한 기사를 보고 가슴이 무척 아팠습니다. 근검절약을 생활원칙으로 삼아 말 그대로 한푼 두푼 모아 세상의 많은 자식 같은 사람들이 나누어 쓸 수 있도록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짧은 유언장을 방안에 남겨 놓고 홀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이 남긴 것은 평생 모든 재산이 아니라 아름다운 마음이라는 따뜻한 유산을 남기셨습니다.

사람이 이름을 남기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아름다운 마음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자세도 의미 있어 보입니다. 유산은 단순히 남겨진 재산이라기보다는 삶의 흔적에 가깝습니다. 할머님의 이름은 기억하기 힘들겠지만 아름다운 마음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마음을 따라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전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맏이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는데 남은 가족을 책임지고 돌보라는 의무가 같이 상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맏이는 싫든 좋든 그에 맞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많은 가족이 함께 많이 살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 살거나 자녀가 많지 않아서 노후에 혼자 사는 가구 비율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유산도 예전처럼 맏이가 독차지하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부모의 유산에 대한 기대는 삶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서 가업을 물려받는 게 아니라 돈을 물려받는다면 탕진하기 쉽습니다. 큰 부자 3대를 못 간다는 옛말이 괜히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돈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었을 때처럼 불행한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최근 들어 평생의 재산을 어려운 이웃에게 내놓고 떠나는 분들의 사연이 자주 눈에 들어옵니다. 과거의 관습이 바뀌어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경제학자는 아예 ‘다 쓰고 죽자’는 캠페인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장례식장에 지출할 비용만 남기고 모두 써버리라고 합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재산을 모아서 유산으로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마음을 버리면 홀가분해지고 자유롭게 남은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동대문 할머니는 자신의 돈을 다 쓰는 방법으로 불우한 이웃을 택했습니다.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으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미리 결정을 해둔다면 고민과 갈등은 사라지고 홀가분하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결정을 할 수 있는 몇 가지 예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를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멋진 여행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가 먹는 등 평생 해보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찾아서 해봅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가족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서도 흔쾌히 돈을 내놓습니다. 유산이라는 개념을 벗어나서 필요할 때 도움을 줍니다. 가령 아파트 계약금을 대신 준다거나 사업을 시작할 때 필요한 자금을 줍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유산으로 만들지 않고 모두 사용하고 떠난다는 생각으로 소비하는 것입니다. 이런 결심은 마음을 홀가분하게 만들고 유산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자유로워 질 수 있는 환경이 됩니다. 강박에서 벗어나면 두려움이나 좌절감이 사라지며 삶은 더욱 윤택해집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장례식장에 지출할 비용만 남겨 놓고 홀가분하게 인생의 무대를 즐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동대문 할머님처럼 남에게 나의 것들을 모두 주는 것입니다. 이타주의적인 행동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데 그만큼 뜻 깊은 일이 됩니다. 종교의 교리처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쉬워보여도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조건을 전제하지 않는 사랑은 가장 아름답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결정한다면 남은 시간들이 좀 더 분명하고 행복하고 자유롭지 않을까요. 동네에 폐지를 줍는 노부부가 계십니다. 늘 폐지를 모은 돈으로 손주에게 과자 꾸러미 사다주는데 힘들어도 반겨주는 그 모습을 보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 없다고 합니다. 함박 웃는 손주 보는 재미로 한다며 남들은 돈 주고 운동하는데 우리는 돈 벌면서 운동하는 거라고 하십니다.

선택은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언제든 수정 가능하므로 너무 신중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스로에게 자유를 선물하는 것이므로 즐겁게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월간암(癌) 201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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