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칼럼
언제나 나의 꿈은 사람을 살리는 멋진 의사
장지혁 기자 입력 2016년 11월 07일 17:17분7,345 읽음
김진목 | 부산대병원 통합의학센터 교수, 힐마루요양병원장, 대한통합암학회 부회장, 대한민국 숨은명의 50, ‘통합암치료 로드맵’ 등 다수 저술

내가 인턴이라는 초보 의사로 환자 앞에 처음 선 것은 35년 전이다. 그 시절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의학 교과서에서 배운 간단한 처치조차 제대로 못 하고 덤벙대는 풋내기 의사였다. 주사기 바늘은 환자의 정맥을 찾지 못해 번번이 헤매었고 간단한 상처를 봉합하면서도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응급 환자라도 만나면 머릿속이 하얘질 만큼 서툴고 미숙하던 시절이었다.
만성적인 수면 부족과 과중한 업무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된 인턴과 레지던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지금은 비록 서투르지만 경험을 쌓으면 내가 꿈꾸던 실력 있는 의사가 될 것이고, 어떤 환자도 척척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힘든 날들을 버틸 수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수련을 거치며, 머릿속 지식이 무의식적 지식으로 조금씩 몸에 배면서 나는 풋내기 의사 딱지를 뗄 수 있었다. 신경외과 의사로 인정받기 위한 첫 관문인 개두술(초보적인 뇌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첫 집도 때 썼던 메스를 넣은 기념패를 뿌듯해하며 받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차차 익숙하고 능숙하게 환자들을 대할 수 있었다.
머리 손상으로 혼수상태가 되어 응급실에 실려 오는 환자를 응급수술로 구해낸 후 의식을 찾은 환자를 대할 때는 더할 수 없이 흐뭇했다. 마치 신이라도 된 양 자부심을 느꼈고, 내가 얻은 지식과 권위에 기쁨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그 건방지고 오만한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환자 앞에 무기력한 의사가 되어

언제부터인가 나는 조금씩 무력해지기 시작했다. 똑같은 상태의 환자를 수술해도 어떤 사람은 낫는데, 어떤 사람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CT로 볼 때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환자는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병이 나으면 병원을 찾지 않아야 할 텐데 계속 병원에 오고 있었다. 만성질환자들은 오랫동안 약을 복용하면서 다른 이상을 호소하기도 했다. ‘경험을 쌓아 실력을 갖추면 환자를 척척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깨졌고, 내가 자부심을 갖고 공부한 의학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교과서에서 배운 의학 이론은 맞지 않을 때가 많았고 똑같은 질병에 걸린 사람도 동일하게 병이 진행되지 않았다. 같은 증상의 환자를 동일하게 수술해도 결과는 달랐고 의학의 정설은 계속 바뀌어 갔다. 최첨단 의학을 공부한 의사로 자부하던 나는 불확실하고, 모호하고, 비과학적인 상황 앞에서 번번이 당황했다.

인간이 완전할 수 없듯이, 의학 역시 완벽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리 첨단 현대의학이라고 해도 질병의 고통을 모두 덜어 줄 수는 없다. 의학이 완전할 수 없기에 임상의학에서 불확실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나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품고 있던 회의는 불확실한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가 원초적으로 갖게 되는 그런 의문이 아니었다. 내가 열정을 갖고 공부한 현대의학의 질병관과 의학적 이론에 대한 회의였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믿고 있는 최선의 치료법이 어쩌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고민이 계속되면서 나는 점점 확신이 없어졌고, 환자 앞에서 더욱 무력해져 갔다.

자기 병도 못 고친 무력한 의사

나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제대로 치유되지 않은 만성병을 가진 환자였다. 간염 보균자였고, 아토피 환자였다. 의학을 전공한 내가 나 자신의 병조차 치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더욱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간염 보균자가 된 것은 레지던트 1년 차 때이다. 당시 만성간염 환자를 수술하던 중 봉합 바늘에 찔려서 혈액을 통해 B형 간염 바이러스가 전염되었다. 말하자면 의사라는 직업 때문에 얻은 직업병인 셈이다.
‘간염 보균자’라는 사실은 그 후 내 삶의 족쇄처럼 따라다녔다. 언제 만성간염으로 발전할지 모르고, 타인에게 간염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면 안 되기 때문에 생활에 제약이 많았다. 웬만하면 술자리는 피해야 했고, 간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다행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20년 가까이 만성간염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심리적 압박감은 대단했다. 대부분의 간염 보균자는 만성간염으로 발전하고, 결국 간경화나 간암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현대의학으로는 전혀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간염 보균자가 그렇듯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야 했다. 내가 환자들의 고통에 일찌감치 눈을 뜰 수 있었던 것도 오랜 세월 간염 보균자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간염 보균자가 되었던 그 무렵 건선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건선은 피부의 재생속도가 병적으로 빨라져서 비늘처럼 각질을 만들고, 긁으면 그 자리에 붉은 피가 맺히는 일종의 자가면역성 피부질환이다. 정확한 발병원인은 밝혀져 있지 않으나 나쁜 식습관이나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스테로이드 연고를 바르면 호전되지만, 약을 끊으면 곧바로 재발하기 때문에 평생을 시달려야 하는 골치 아픈 만성 피부질환이다.

중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목에 가벼운 발진을 보이며 아토피 증상이 나타났다.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잘 낫지 않고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다. 과로하거나 식생활이 불규칙하거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아토피도 어김없이 심해졌다.
모든 만성병 치료가 그렇듯이 아토피에 대해서도 현대의학은 속수무책이다. 증상 완화제의 남용으로 오히려 병증을 만성화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아토피에 많이 쓰이는 스테로이드제는 염증을 억제하는 강력한 증상 완화제로, 장기간 사용할 경우 부작용 폐해가 심각한 약물이다.
강력한 염증 억제제인 스테로이드제가 오늘날 부작용 천국을 만든 일등 공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가능한 한 약을 쓰지 않고 가려움을 참아내야만 했다. 그러면서 현대의학에 대한 회의는 더욱 커져갔다.
잘 낫지 않는 병을 안고 살아야 하는 만성병 환자로서의 경험은 환자들의 고통을 헤아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현대의학의 한계를 환자 입장에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의사가 되어 환자를 진료하면서, 그리고 나 스스로 치유되지 않는 병을 앓으면서, 비로소 내가 자부심을 갖고 매달린 현대의학의 한계와 문제점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환자 앞에서 무기력한 의사로서의 자괴감, 그리고 자신의 병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하는 의사로서의 좌절감으로 방황하던 나는 결국 2002년 봄 다니던 종합병원에 사직서를 냈다. 의사인 내가 신뢰하지 않는 치료법을 환자에게 권하며 그 길을 평생 걸어야 한다는 것이 더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병원을 떠났고 현대의학자의 길을 접었다. 자신도 치유하지 못하는 만성병 환자라는 꼬리표만 달고서…….

니시의학으로 치유한 아토피와 건선, 간염

병원을 그만둔 나는 대체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현대의학자의 길은 접었지만 의사로서의 길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대체의학을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어느 한 분야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두루 관심을 갖고 탐구를 계속했다. 동양의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중국에 1년간 다녀오기도 했고, 닥치는 대로 대체의학 서적을 읽어 나갔다.
그 무렵 니시의학(西醫學)을 알게 되었다. 니시의학은 반자연적인 생활습관을 바로잡아 병을 치유하는 자연의학이다. 약을 전혀 쓰지 않고 식사와 생활습관을 교정해서 현대의학으로도 낫지 않는 난치병을 치유시킨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황당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니시의학의 임상 결과에 대한 자료를 접하면서 관심이 갔고 과연 맞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내 아토피가 낫는지를 직접 시험해 보자는 생각으로 2002년 겨울 일본 동경으로 갔다. 니시의학의 맥을 잇고 있는 와타나베 쇼 선생이 운영하는 동경 와타나베 의원을 찾았다. 와타나베 선생은 홋카이도 의과대학 내과 교수를 지낸 현대의학계의 중진이다. 그 역시 현대의학의 한계로 고뇌를 거듭하다 니시의학을 알게 되었고, 스스로 니시의학의 효능과 안전성을 입증하기 위해 45일 동안 곡기를 일절 끊고 생야채식을 하는 등 남다른 실험정신과 탐구 열정을 가진 의학자이다. 니시의학의 효과를 확신하면서 미련 없이 현대의학자의 길을 접고 자연의학자가 된 용기 있는 분이다.

세계적인 대체의학자인 와타나베 선생은 현재 8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청년 같은 열정으로 환자를 보고 있다. 말수는 적지만 “좋아! 괜찮아!” 하며 항상 긍정적인 말로 환자의 기운을 북돋우는 명의다운 카리스마를 가진 분이다. 전 세계에서 난치병을 앓는 이들이 니시의학으로 치료를 위해 그를 찾고 있다.
와타나베 선생은 내 삶을 바꾸어 놓을 만큼 큰 영향을 준 스승 같은 분이다. 그를 통해 니시의학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도전에 주저하지 않는 용기와 의사로서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와타나베 선생의 지도로 단식과 생야채즙, 니시운동, 풍욕, 냉온욕 등을 하면서 니시의학을 시작한 지 1주일 만에 내 아토피는 나았다. 지긋지긋하던 아토피의 가려움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그것도 그렇게 단순한 방법으로 치유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중증 아토피는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달고 산 만성병이 일주일 만에 나았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당시 정상보다 약간 체중이 더 나갔던 나는 몸무게가 5kg 정도 줄었고,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운 최상의 컨디션을 보였다.
사실 니시의학을 시작할 당시 나의 심신은 최악의 상태였다. 간염 보균자에 건선과 아토피는 더 심해진 상태였고 면역력이 떨어져 39도나 되는 고열 감기를 앓고 있었다. 그러나 와타나베 선생은 그 흔한 해열제 한 알 쓰지 않고 오로지 니시의학만으로 나를 치유했다.

일주일 만에 아토피의 가려움에서 해방된 나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또 하나의 선물을 받았다. 20년간 간염 보균자로 살아온 나에게 간염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생겼고 지병인 건선의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내 삶을 억눌러 온 만성간염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현대의학자로 살면서 환자에게 감염되어 얻은 간염 바이러스를 현대의학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는데 니시의학으로 치유된 것이다. 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자연의학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열다

니시의학의 치유 메커니즘을 현대의학의 과학적 의학관, 즉 세포 구조, 생화학, 생리학, 분자생물학적인 용어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 이유로 니시의학을 비롯한 많은 대체의학이 비과학적이고 원시적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 비과학적이라는 요법이 ‘자기 병도 못 고치는 의사’로 살았던 나에게 건강을 되찾게 해 주었다. 중요한 건 바로 그것이다. 현대의학으로 고치지 못한 병을 치유했다는 그 분명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의학적 가치는 없을 것이다.
니시의학을 통해 간염과 아토피의 굴레에서 벗어난 나는 니시의학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확신을 의사로서 병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 후 나는 자연의학자가 되었고, 의사로서의 삶에 전환점을 맞았다.
월간암(癌) 2016년 9월호
추천 컨텐츠
    - 월간암 광고문의 -
    EMAIL: sarang@cancerline.co.kr
    HP: 010-3476-1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