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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과 함께 찾아온 변화의 기회

이 기사는 고동탄 기자가2016년09월07일 11시53분에 최종 입력하였습니다. 총 5990명이 방문하여 읽었습니다.



이남희 | 62세, 폐암 초기

나는 공주에서 태어났다. 딸이 여섯에 막내아들이 있는 7남매 집에서 다섯째 딸이었다. 당시에는 평범한 시골의 가정이었다. 국민학교까지 공주에서 마치고 14살이 되었을 때 서울 구로공단에 있는 봉제 공장에 취직해서 올라왔다. 하루에 한 끼 밖에 못 먹는 배고픈 시절, 힘들지만 하루하루 견뎌가며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면서 생활했다. 그리고 봉제업은 내 직업이 되었고 평생 그 일에 종사했다. 작년에 다니던 회사를 은퇴했지만 아직 남은 힘이 있고 무엇보다 일을 하고 싶어서 작은 봉제업체를 작년 9월 세종시에 차렸다. 나는 일을 사랑했고 지금도 일에 묻혀서 살고 싶다. 비록 암과 투병 중이지만.

최근 나는 중국 상해와 베트남 등지에 있는 현지 공장에서 관리자로 일해 왔다. 2012년 9월 중국에 체류하기 위해서 그곳의 신분증이라 할 수 있는 거류증을 만들기 위해서 신체검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 의사가 폐에 암이 의심되니 한국으로 돌아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전했다. 그러나 당시 나는 현지 공장에서 생산이사의 신분으로 막중한 업무를 맡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암이라는 말에 놀랐지만 일단은 직장 일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이듬해 설 명절에 한국으로 돌아와 동네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에 순천향 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를 보기도 전에 연휴가 끝났고 업무에 다시 복귀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무서운 마음으로 중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 당시 회사의 사장님과 아들이 동행하여 담당 의사를 만나 최종적으로 암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그날 아들이 전화를 걸어 암이라는 소식을 전하는데 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엉엉 울어야 했다. 내심으로는 중국 사람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설마 내가 암일까라는 생각으로 견딜 수 있었는데, 한국에서 최종으로 폐암 진단을 받고 보니 놀랍고 슬프고 절망뿐이었다.

평생을 큰 병 없이 잘 지내왔는데 하루아침에 암환자가 되었다. 봉제공장에서 먼지와 함께 오랫동안 생활했고, 관리자가 되면서는 스트레스에 치어서 지내왔다. 내 몸과 정신을 혹사시켜 이런 큰 병에 걸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중국에 남던가,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가 치료받던가. 결국 한국행을 결정했다. 다행이 사장님의 지인이 안암동에 있는 고려대학병원에 있었다. 검사 자료를 보고는 담당 교수님은 정말 행운이라며 미소를 보였다. 갈비뼈 뒤쪽은 발견이 어려운 곳인데 다행히 초기에 치료를 하게 되었다면서 천운이라는 말에 나는 내심 안심이 되었다. 종양은 양쪽 갈비뼈 안쪽으로 대략 1.5Cm 내외의 크기로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입원하고 수술 날짜를 잡았다.

생전 처음으로 수술대 위에 올랐다. 나는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 떨고 있었다. 이제 여기 들어가면 죽는구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죽음의 공포였다. 침대가 들썩거릴 정도로 떨고 있는데 옆에 있는 간호사가 나의 손을 꼭 잡고는 마음을 진정하고 편히 하라며 안심을 시켜준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모두 끝나 있을 테니 잠깐 낮잠 잔다고 생각하라는 말에 그나마 조금 진정이 되었다. 침대 위에 누워서 수술실로 들어가니 커다란 조명이 비추고 있었고 눈이 부셔 눈을 감았는데 얼마 후에 진짜 잠이 들었다. 2013년 3월의 일이었다.

보름 정도 병원에서 회복을 한 후에 퇴원하였다. 담당의사가 항암치료는 불필요하게 생각하였는지 수술만 받고 퇴원하였다. 그리고 언니가 있는 속리산으로 갔다. 언니 집에는 작은 황토방이 있었다. 병원에 있으면서 암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들었는데 암은 뜨거운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황토방에서 소나무를 주워 장작불을 때면서 지내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황토방에 불을 넣고 한 시간 정도 지나면 뜨끈뜨끈해지는데 바닥에 대고 몸을 지졌다. 특히 수술한 부위를 집중적으로 바닥에 대고 땀이 주르륵 흐를 정도로 찜질을 했다. 방바닥뿐만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에도 수술 부위를 비추기도 하고, 불의 기운을 입으로 빨아들인다는 생각으로 입을 크게 벌려서 숨을 들이 마시고 내뱉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졌다. 수술 후에 가래가 끓었는데 가래도 많이 가라앉고 효과를 보았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상해에 있는 회사로 복귀했다. 당시 사장님께 너무 많은 빚을 진 기분이 들었고 일을 열심히 해서 그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다. 더구나 병가였는데도 월급이 입금되어 있었다.

이제 나의 생활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음식을 가려야 되고, 면역주스라는 것도 만들어서 먹어야 되고 무엇보다 물은 차가버섯으로 차를 만든 물만 먹었다. 내가 병상에 있을 때 딸이 암에 좋은 여러 가지 음식과 생활 방식을 공부하고 알려 주었고 나는 딸의 말에 따랐다. 상해로 업무 복귀를 하고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였다. 상당히 피로한 상태로 소변을 보았는데 이건 소변이 아니라 피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회사의 통역하는 사람과 함께 큰 병원으로 갔다. 방광에 염증이 생겨서 혈뇨가 나온다는 소견을 의사가 말하면서 약을 지어 주었다. 나는 통역에게 제일 비싼 약으로 달라는 말을 전해 달라면서 일주일치 약을 받아 숙소로 돌아 왔다. 다행히 그 약을 먹고 혈뇨는 서서히 사라졌다. 또 식욕이 없어졌다. 여태 밥맛이 없어서 식사를 걸러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밥을 먹어야 일을 할 텐데 밥을 못 먹으니 기운이 없고 살이 빠지고 업무도 능률이 안 올라서 고생하게 되었다. 예민해져서 주변 사람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반찬 투정을 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일에 몰두했다. 병을 이기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었다.

정기 검진을 받으러 한국을 다녔는데, 2014년 12월에 담당 의사는 다시 수술을 해야겠다고 말한다. 처음 수술을 할 때 양쪽 수술을 못해서 한쪽의 암을 제거했는데 나머지 한 쪽의 암도 제거하자고 말한다. 나는 두 번째 수술을 받았고 역시 속리산에 있는 언니네 집에서 한 달 정도 똑같이 황토방에서 장작불을 때면서 요양을 하였다. 회복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나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베트남에 있는 회사였다. 검진 시기에 맞춰서 베트남과 한국을 왕래하면서 투병생활을 하였다. 중국보다는 더욱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다행히 바이어의 업무를 보았기 때문에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이겨내야 한다는 의지로 버텼다. 그리고 작년에 베트남의 일을 그만두고 은퇴했다.

작년 9월 세종시로 이사했다. 조용한 동네에 무엇보다 언니들이 주변에 살고 있어서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다. 최근 3월에 했던 암검사에서도 모두 정상으로 나왔고 현재 컨디션도 비교적 좋다. 이곳에 작은 봉제업체를 차렸는데 불과 몇 달이 지났지만 일이 제법 늘고 있다. 아침 7시 반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하고 저녁이면 강둑을 따라서 산책하고 삶이 주는 소중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나는 암을 진단받고 지금까지 꾸준히 해오는 일이 있다. 딸이 알려 준 비법이다.

첫 번째는 해독주스를 먹는 것이다. 당근, 브로콜리, 토마토, 양배추를 섞어서 30분 동안 삶고 식힌 후에 바나나 1개와 사과 1개를 같이 먹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공복에 먹는다. 두 번째는 차가버섯 가루를 물에 섞은 후에 유리병에 넣은 후에 음료수로 마신다. 첫 번째 수술을 하고 난 이후로 음료수는 언제나 차가버섯 물이었다. 행여 멀리 여행을 갈 때도 물은 언제나 차가버섯 물이었다. 딸이 어디서 알았는지 고려인삼공사의 차가버섯을 사왔는데 처음부터 먹게 되었고 또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꾸준히 음용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운동을 한다. 적어도 하루에 40분 이상은 걷는다. 큰 운동은 아니지만 햇빛을 보면서 하는 운동은 나에게 큰 효과를 주었다. 그리고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은 사용하지 않으며 마스크를 쓰고 생활한다. 예전에는 잘 때도 마스크를 쓰고 잤다. 그리고 암에 걸리기 이전에는 화학조미료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멸치, 새우, 다시마로 육수를 내어 먹는다. 마지막으로 음식은 모두 싱거워졌다.



내가 하는 것들은 모두 큰 비용 안 들이고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다. 처음에는 살기 위해서 했지만 몸에 익숙해지고 적응이 되니 평생 할 수 있는 일이다. 세종시에 처음 올 때만 해도 사람들이 나를 보면 해골 같다고 했는데 지금은 사람의 모습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이제는 잠도 잘 자고 살도 조금씩 붙었다. 내 나이 62살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많은 기회가 생길 수 있다. 평생 한 업종에서 일해 왔기 때문에 업계에서는 어느 정도 인지도도 있다. 다시 직장에 복귀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새로 시작한 일을 키우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루하루 몸과 마음은 건강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비록 암을 진단 받고 투병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린 아이처럼 꿈과 희망이 가득하다. 시골 생활이 주는 기쁨을 누리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일은 나에게 암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치유의 기쁨을 주었고 또 다시 기회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