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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4기, 10년을 돌아 보며

이 기사는 김진하 기자가2015년06월30일 16시26분에 최종 입력하였습니다. 총 26242명이 방문하여 읽었습니다.

김의순(62세) | 위암4기. 제암요양병원 원장


나는 의사이다. 경희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평생 외과의사로 살았다. 지금은 62세. 올해부터 경남 김해시 진영읍에 자리한 제암요양병원에서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의사도 암에 걸린다. 하지만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위암 4기는 더욱 상상도 하지 못했고 올해로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을 이렇게 돌아보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암 진단을 받은 것은 2006년 11월 2일이다. 징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몇 달 전부터 불편한 느낌이 있었고 소화는 잘 안 되었고 속은 더부룩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흔한 소화기 증상이었고 나이를 먹어 그런 건가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갈 정도였다. 그런데 자려고 누워서 문득 배를 만지다보니 딱딱한 종기가 잡혔다. 의사로 다른 사람을 진단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환자로 생각하며 세심하게 만져보니 피부 아래로 딱딱한 무엇인가 만져졌고 순간 한 대 얻어맞은 듯 했다. ‘암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니, 궤양 정도만 된다면 이제부터는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겠다.’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내 속으로만 되뇌며 간절히 바랬었다.

날이 밝자 학교 후배에게 아침에 출근하면서 들르겠다고 일러두고는 조용히 후배의 병원을 찾았다. 내시경을 하고는 바로 병원으로 가야하니 수면마취 없이 진행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데 후배가 선배님 뭘 이런 걸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다. 순간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찜찜하니 조직검사 몇 개 하겠습니다 하는 게 아닌가. 정말 별일이 아닌가 싶어 검사한 화면을 보았다. 평생을 의사로 살았는데 무엇을 의미하는 지야 바로 알 수 있었다. 후배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죄인처럼 굴었다. 암이 이미 형태가 만들어졌으니 중기 이상의 진단이 내려질 것이며 지금 상황에서 조직검사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빨리 수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는 것이 순간 머릿속에 스쳐갔다.

나는 서울 미아리에서 김외과의원을 1989년부터 운영해왔다. 20년 가까이 꾸려온 병원이니만큼 애착이 강했지만 내시경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는 바로 원무과장에서 전화해서 상황을 전하며 나는 오늘부터 병원을 안 간다고 통보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는 병원에서 오는 전화만 받고는 출근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시 아이들은 모두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고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있어서 혼자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던 처지였다.

다음으로는 치료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때 떠오른 분이 세브란스 병원의 노성훈 선생이었다. 나와 같이 군 생활을 했고 위 수술을 잘하는 친구였고 무엇보다 내 몸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친구였기에 바로 연락을 했다. 11월 4일 진찰을 받고는 11월 6일 입원하고 11월 8일 수술을 받았다.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취가 풀리고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나는 제일 먼저 시계를 보았다. 수술이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면 암이 너무 많이 퍼져서 의사가 수술을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대략 계산으로 3시간 정도였기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회복실로 옮기고는 직업 정신에 저절로 주변 의료시스템을 살펴보니 암 수술 시스템이 최고 수준이라 감탄이 절로 나왔다. 수술이 끝나고 날짜별로 스케줄이 정해져 있었다. 3일째는 걷기를 시작했는데 나보다 하루 먼저 수술을 한 사람이 앞서서 걸었고 뒤에 있는 사람은 나보다 늦게 수술을 받았다. 그렇게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니 경쟁심도 생기고 낙오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게 되기도 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기도 하여 혼자 하는 것보다는 훨씬 회복에도 도움이 되었다.

4주가 지나 항암 치료가 진행될 차례였다. 나는 고심 끝에 경희대병원을 선택했다. 수술은 집도하는 의사의 손놀림과 경험 등이 큰 영향을 주지만 항암 치료는 공통이기에 굳이 좋고 나쁜 것을 따질 이유가 없었기에 가능하면 마음 편안한 곳을 최우선 순위로 두었고 모교인 경희대가 가장 익숙하고 편안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전에 시간 여유가 있어서 일본으로 온천여행을 다녀왔다.

그 후에 당시 경희대학교 종양학과 김시영 교수를 찾았다. 후배였던 그를 암환자가 되어 찾았는데 몹시 냉정하게 진료를 해주어서 서운했던 기억이 난다. 선배님 힘드시죠 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속으로 중얼거렸었다. 내내 냉정하게 진료를 봐주던 후배는 항암 과정이 끝나고야 아픈 속내를 드러냈다. 그제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배려와 안타까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총 6회 주사제 치료였는데 혈소판 감소가 심해져서 3회만 맞고 경구용 항암제로 바꿔야 했다. 주사 치료가 너무 힘들어서 항암제를 바꾸는 것이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남들 다 받는데 못하면 포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생각들이 괴롭혔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결론을 내렸었다.

당시 나와 같은 암환자의 5년 생존율은 20% 이내였다. 하지만 나는 그 20%를 결코 적다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 확률 안에 들 수 있다는 자기 암시를 하며 희망을 절대 놓지 않았다. 내 위의 암은 위벽까지 침투해서 뚫고 나올 기세였고 주변의 임파선과 신경들까지 전이되어 있는 상태로 위암 4기였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지역의사회 총무를 맡았고 사회적인 이슈가 있을 때면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는 소위 데모도 했다. 자연히 술과 담배도 많았고 술자리에 대부분 고기와 함께였다. 일상이었던 그런 생활이 암에 걸리고야 후회가 되었다. 수술 후 회복기와 항암 치료를 받으며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많은 반성을 했다. 만약 그런 무절제한 식습관과 생활 때문에 암에 걸렸다면 이제부터 그런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살 확률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 내 몸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반성하고 열심히 시간을 보내면 더 오래 살 수 있지 않을까. 파도처럼 생각들과 번뇌와 후회가 밀려왔다 밀려나가기를 반복하며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각을 하면서 그동안의 삶에 두 가지의 후회를 꼽았었다.

하나는 술에 관한 것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같을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인생을 논하고 세상을 논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즐기다가 어느 순간이 넘어가면 술이 술을 마시게 되고 그 뒤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날 때가 많았다. 그렇게 술기운에 취해 기억조차 나지 않는,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수많은 시간들이 너무도 아쉬웠다.

다른 하나는 억눌렀던 감정에 대한 후회였다. 두고 보자는 식으로 억눌러두고 미운 감정을 쌓아두고 표현하지 않았던 것들과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온 세월이 후회스러웠다. 미움이든 분노든 진실 되게 대하지 못했고 진실 되게 표현하지 못했던 가식적이었던 과거의 나 자신에게, 자만심을 갖고 살아온 지난 나의 시간들이 후회스러웠다.

항암 치료 중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운동에 관해서다. 주사를 맞은 날은 기진맥진하여 앉을 수 있는 기력조차 없었다. 하지만 명색의 의사이고 움직여야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추운 겨울에도 밖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살고 있는 아파트 동을 한 바퀴 도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돌다가 아파트 단지를 돌았고, 그 다음에는 강가를 걸었고 그 다음 봄쯤이 되어서는 여의도를 한 바퀴 돌게 되었다. 처음 아파트를 나섰을 때의 목표가 여의도를 한 바퀴 돌자는 것이었는데 매일 시도를 하니 시간은 걸렸지만 결국에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의도를 한 바퀴 힘들이지 않고 돌고 나서 다음에는 무엇을 할까 생각하니 대학시절이 떠올랐었다. 학교 산악부에서 활동했던 기억이 떠오르니 문득 산에 가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생겼다. 그래서 무작정 비가 오는데도 우비를 입고는 버스를 타고 북한산으로 갔다. 그리고는 산 아래에서 산이 어떻게 생겨나 비가 내리는 북한산을 바라만 보다가 돌아왔다. 그날 저녁 신발장을 뒤져 구석에서 등산화를 꺼내 먼지를 털어놓고 다음날은 도시락을 준비해서 북한산을 올랐다.

산에서 풍겨오는 신선한 산내음, 싱그러움, 산의 습기를 느끼며 올라갔다. 산에 있는 표지판과 나무에 달린 이름표의 모든 글자를 다 읽었다. 그래야 천천히 가면서도 쉬지 않고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계단을 오를 때면 돌 사이에 삐죽한 이름 모를 풀을 보면서 너도 힘들게 세상에 나왔구나 기운 내어 살려무나 나도 기운을 내마 속삭였다. 그렇게 산과 병원을 오가다가 항암 치료가 끝났다. 경구용 항암제라 기간이 조금 길어졌고 약간의 부작용에 시달렸지만 치료는 성공적이었다.

막상 치료가 끝나고 나니 두려운 마음이 급습했다. 그때까지는 약에 의지해서 버텨왔는데 이제 약도, 주치의도 나를 떠나고 혼자만 남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앞길이 막막했었다. 그래도 산은 아직 저기에 있어주니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으며 산을 다녔다. 다행히 한 후배가 산행에 동무가 되어주어 외롭지는 않았다.

그렇게 병원 치료가 끝나고 투병생활을 하면서 암환자라면 누구나 그렇지만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이제 무슨 쓸모가 있는 사람일까 싶었다. 그러다가 교회에서 여름 방학 때 해외 의료봉사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는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봉사자끼리 교회에서 서로 알고 지낸 사이었고 원장님의 투병을 응원한다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니 자리만 지켜도 괜찮다며 같이 가기를 권유했다. 이 문제를 주치의와 상의하니 완강하게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당시 몽골로 예정되어 있던 일정별 스케줄과 숙소, 현지의 의료 상황 등의 자료를 주치의에게 보내주고서야 겨우 허락을 얻어 의료봉사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를 시작으로 몽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지로 의료봉사를 다녔다. 보통 교회의 의료봉사는 경비가 자비 부담이었다. 나는 이 봉사활동으로 내가 아직은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심리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아 감사했다.

어느 정도 투병생활에 익숙해지자 병원을 돌아봤다. 그동안 대진 의사로 운영해왔지만 신경을 못 쓰고 소홀했던 탓인지 적자 운영이 지속되었다. 모두 식구나 마찬가지인 개원 때부터 함께 했던 직원들이었고 내가 책임을 져야 할 병원이었기에 복귀를 해야 했지만 진심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서 몸이 병들었는데 다시 그 속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결국엔 고심 끝에 김외과 병원으로 복귀를 결심하고 당시 원무과장과 함께 홍도 여행을 다녀왔다. 복귀 전 재충전을 위한 여행이었지만 속으로는 병원이 다시 잘 돌아가게 되면 때를 봐서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결국 2년 정도 지나 병원은 문을 닫았다. 늦게 출근했고 오후에는 일찍 병원 문을 닫았고 매주 수요일은 전 직원과 산행을 다니는 등 업무보다는 투병에 더 지극정성이었고, 남들이 보기에는 돈 버는 것보다 노는 데 열중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2010년 가을, 폐업 신고를 했다.

그 후로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출근하는 비상근 의료진으로 취업을 했다. 남들 보기에는 노는 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 노는 것이 바로 투병이고 치료였다. 일에 지쳐 매일 출근하게 되면 다시 몸이 망가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개인적인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비상근으로 업무를 보면서는 일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기에 이만하면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 한쪽에는 이제는 서울을 벗어나 따뜻한 남쪽에 가서 지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시간을 내어 인터넷을 둘러보고 여수에도 가보고 진해에 있는 요양병원도 가보았다. 진해에 갔을 때가 당시 4월이었는데 온 천지가 벚꽃으로 뒤덮였고 꽃향기로 가득했다. 아름답고 편안한 도시였다. 이런 곳에서 지내면 몸속의 암도 모두 사라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또 새로 생긴 요양병원이라 여러 면으로 내가 있기에 적합했다. 더도 말고 딱 일년만 살아보자고 결심하고 진해로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시골 생활을 시작했다.

5일장이니 3일장이니 하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시끌벅적한 시골의 장날에 푹 빠져서 찾아다녔고 배를 타고 다도해에 많은 섬들을 찾아서 산을 올라 다녔다. 따뜻한 남쪽의 풍경과 바다와 산에 도취되어 시간을 잊고 즐겁게 지냈다. 그러다보니 일년 예정이었는데 삼년을 훌쩍 넘기게 되었다. 그 무렵 진해의 요양병원의 주인이 바뀌었다. 새로 바뀐 병원의 주인은 열정이 넘쳤고 매우 의욕적으로 업무를 추진했다. 처음 병원이 개원할 때부터 있었기에 새로운 출발을 도와준 후 미국에 가서 손주도 보며 한동안 지낼 생각을 하였다. 미국에서의 짧지 않은 일정을 계획하며 서울 집으로 와서는 미국 여행 후에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면서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경남 진해에 위치한 진영제암병원의 모집공고를 보게 되었다.

2014년 12월 말쯤이었다. 제암병원이 어떤 곳인가 검색을 하는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번쩍하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이 병원은 나를 위한, 내가 해야 할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그리고는 바로 미국행을 비롯한 모든 일정을 기약 없이 뒤로 미루고 올해 2월부터 진영제암병원에서 암환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늘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면서 스스로에게 암에 걸려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하곤 한다. 만약 이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강박감에 쫓겨 진료를 위해 병원으로 향했겠지만 이제는 그런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낫고 스스로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아침 소파에서 잠이 깰 듯 말 듯 누워있는데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에 눈이 부셔서 눈을 뜨는데 알 수 없는 행복감이 온몸에 차올랐다. 평일 아침 아홉 시가 넘은 시각, 집안 소파에서 한가로이 누워 있는 것만으로 나는 더할나위 없이 행복했다. 이런 충만한 행복을 암이 오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시골이 너무 좋아서 서울로 가지 않는다. 누군가 계획을 묻기에 무계획이 나의 계획이라고 답해주었다. 더는 그물처럼 빽빽한 계획안에 스스로를 밀어 넣지 않고 나를 몰아세우지 않고 편안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무책임한 듯 살고자 한다. 그래서 이곳 진영제암병원은 오직 암환자들의 쉼과 투병을 위한 자리로 만들고자 한다.


힘들어하는 암환자들을 볼 때면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질 때가 많다. 나는 여전히 그들의 연장선에 위에 서있을 뿐인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운명처럼 다시 암환자들과 마주하며 그들을 위로하며 나도 위로 받는다. 누구보다 외로운 사람이 암환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암 투병을 시작하면서 듣고 싶었던 따뜻한 위로와 기꺼이 내밀어 안아주는 손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떠올리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가 그때의 나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손을 내밀어 그분들을 붙잡고 있다. 그리고는 말해준다. 울고 싶을 때는 마음껏 울어야한다고, 지금까지 못 울었던 것까지 지금 다 울어야 한다고 말이다.